‘상속’ ‘새의 선물’ 등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 은희경씨가 시애틀 지역에 약 2년간 체류했었다. 중견 언론인인 남편과 두 10대 자녀 등 온 가족이 자그마한 셋집에 살며 주말엔 친지들과 어울려 등산을 즐겼다. 시애틀이 조용해서 글쓰기 좋다고 했는데, 막상 새 작품을 쓸 때는 ‘더 조용한 곳’에 혼자 방을 얻어 몇 달씩 틀어박혔었다. 은씨보다 2년쯤 먼저인 2003년엔 ‘시늉인생’(Gesture Life)으로 ‘40세 미만 미국 베스트 작가 20인’ 명단에 이름을 올린 한인 2세 작가 이창래씨가 시애틀 중앙도서관 초청으로 독자와 만남의 자리를 가졌었다.
마치 강우량과 비례하듯 독서 인구가 많아 미국의 대표적 문향(文鄕)으로 꼽히는 시애틀에 지난 11일 또 한 명의 유명 문인이 찾아왔다. 박경리 세대의 올드타이머 한인들에겐 낯선 이름이지만 요즘 한국에선 은희경씨보다, 미국에선 이창래씨보다 더 크게 뜨는 코리안 작가이다. 장편 ‘엄마를 부탁해’로 일약 글로벌 작가의 반열에 올라선 신경숙씨다.
신씨는 이 소설의 영문판인 ‘Please Look After Mom’의 판촉 사인회를 11일 저녁 7시 시애틀의 대표적 토박이 서점인 캐피털 힐의 엘리엇베이 북 컴퍼니에서 가졌다. 미국 내 7대 도시 홍보투어에 나선 신씨가 시애틀을 출발지점으로 삼았다는 점이 흐뭇하다.
‘
엄마를 부탁해’는 2008년 말 출간돼 지금까지 한국에서 무려 170만부나 팔렸다. 영문판도 지난 5일 미국의 대표적 문학출판사인 노프가 초판으로 10만부를 발간했다. 이미 3,000부를 추가로 찍은데 이어 3판을 준비 중이다. 한 번도 실려지기 어려운 뉴욕타임스 서평란(북 리뷰)에 두 번이나 소개됐다. 황석영씨와 안정효씨에 이어 한국 작가로는 세 번째다.
안정효씨는 영어를 썩 잘했다. 월남전 파병기간 동안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스에 ‘전장일기’를 장기 기고한 것이 인연이 돼 제대 후 기자로 특채됐다. 한참 후 그 신문사에 입사한 나는 안씨가 미국 소설 한 권을 며칠 안에 번역해 내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얼마 안 가서 기자에서 소설가로 전환, 월남 참전경험을 배경으로 ‘하얀 전쟁’을 썼다. 자신이 직접 번역한 이 소설의 영문판 ‘White Badge’가 1989년 뉴욕타임스에 소개됐었다.
물론, 신씨의 신데렐라 같은 성공은 작품이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중요한 성공 요인이 숨어 있다. 원작 못지않게 우수한 번역이다. 한국 문인들이 노벨문학상을 못 받는 이유는 훌륭한 번역가가 없기 때문이라는 말을 흔히 듣는다. 우수한 한국문학 작품이 많지만 번역가 부재로 세계 문단에 소개되지 못했다. 자질 있는 번역가는 지금도 매우 드물다.
‘엄마를…’의 번역자는 놀랍게도 한국의 전문 번역가가 아닌 LA의 여변호사 김지영(30)씨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보는 1.5세다. 김씨의 번역은 ‘원래 영어로 쓰인 것처럼 미국인 독자들에게 매끄럽게 읽힌다’는 찬사를 듣는다.
한인 부모들은 자녀교육 차원에서 신씨보다 김씨에게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에서 자라는 자녀들이 신씨처럼 한글로 소설을 쓰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이창래씨처럼 영어로 쓰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신씨의 책을 영어로, 이씨의 책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은 본국인들보다 유리할 수 있다. 바로 김씨가 그 증거이다.
자녀에게 변호사나 의사가 되라고 다그치는 건 구태다. 김씨는 변호사 일을 집어치우고 번역가로 더 출세했다. 체력이 국력이라는 건 20세기 때 얘기고 지금은 번역이 국력인 시대다. “번역을 잘하면 나라가 커지고 나라가 커지면 번역 일이 더 많아진다”는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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