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중에 도서관 사서로 있다가 은퇴한 후 일 주일에 한 번씩 도서관에서 봉사하는 한인이 있다. 며칠 전 만났더니, 누군가 한국 책들을 신시내티 시 도서관에 기증했는데 도서관 사정상 한국도서를 더는 소장할 수가 없어서, 그 책들을 도서관 부설 헌책 상설 판매장에 내어 놓았다 한다. 그 중엔 내가 살만한 책도 있을 것이라며 가보겠느냐고 물었다.
그 친구는 1960년 스무 살에 미국에 온 후 주로 미국식 생활을 해와서 한국 책은커녕 한국말도 많이 잊고 있다. 그런데도 도서관은 관계자 중에 그가 유일한 한인이라서 책값 책정을 그에게 부탁했다. 그는 책을 펴 봐도 무슨 책인지 몰라 난감하다며 내 의견을 듣고 싶다고도 했다.
지금 있는 책들도 책장에 다 꽂지 못해 지하실에 쌓아두는 형편인데도, 책 욕심이 발동한 나는 그를 부추겨 그 자리에서 판매장으로 향했다. 여느 헌 책방처럼 허술한 건물 안엔 헌책들이 빼곡 빼곡 진열되어 있었고, 몇몇 직원들이 최근 들어온 책들을 부지런히 정리하고 있었다. 친구를 따라 구석으로 가니 제법 많은 한국책들이 카트에 실려 있었다.
토지, 대망, 한국현대문학, 한국고전문학, 한국야담 등의 전집을 위시하여, 이어령 작가 등의 철학 수필집, 최인호 작가 등의 소설책, 꿈에 관한 책, 외국문학 번역책, 요리책 등 다양한 단행본도 200여 권은 족히 되었다. 일본책들도 그만큼이나 있는 것을 보면 전 주인은 일제시대 때 교육받은 사람이 분명했다.
책을 종류 별로 분류해주고 나니, 친구가 번역본은 한국책이 아니니 누가 사겠냐며 쓰레기통에 버려야겠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펄쩍 뛰며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도서관 측에서 기증인의 이름을 갖고 인터넷에서 추적한 바에 의하면, 기증인은 80대의 샘스 씨로 오랫동안 함께 살던 한인 부인을 얼마 전에 잃으셨다 한다. 아, 나도 이 동네에서 18년이나 살았는데, 샘스 부인이 살아계셨을 때 서로 알고 지내면서 이런저런 책 얘기를 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외국에서 살뜰하게 모여지고 귀하게 읽혀졌을 그분의 한국 책들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미국인들 틈에서 다시한번 읽혀질 기회도 없이 결국엔 쓰레기통에 버려질지도 모를 거란 생각이 들자 머리와 가슴에 찬바람이 일었다.
친구의 예상대로 고전문학전집과 야담전집을 사들고 나오는데, 50여개의 한국 음반이 눈에 띄었다. 역시 샘스 씨가 책들과 함께 기증했다는데, 백설희, 고복수, 남인수, 현인, 이미자, 김세레나, 이은관, 고백화, 최희준, 조영남, 송창식, 미조라 히바리 등의 음반들이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흥얼거리시던 노fot소리들을 다시 듣는 것도 같고, 학생시절 종종 있던 국문과와 연극부 술자리에서 남학생들이 목청 높여 부르던 노래를 다시 듣는 것도 같고, 통기타 카페의 노랫소리도 들리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10여 장을 사고 말았다.
재미있는 것은, 실은 100여 개의 음반이 기증 되었는데, 며칠 전 어느 미국인이 서양 옷 입은 한인 여가수 표지의 음반 50여개만을 골라 모두 사갔다고 한다. 그 이유는 직원 누구도 알지 못했다.
책과 음반으로 꽉 찬 박스 두 개를 들고 집에 들어서다가 천장까지 뻗친 책장 속의 내 한국 책들을 보며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희들의 미래는 또 어찌될까나? 미래를 끝까지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들고 들어온 샘스 부인의 책들에게 미안했다. 그래도 우선은 여기서 내가 맘껏 사랑해주마.
그날 저녁 나는 인현왕후를 잠깐 만나고 춘향이와 홍길동도 잠깐 만났다가, 시가(詩歌)를 잠깐 읊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 집 턴테이블은 두어 시간 쉴 새 없이 이 음반 저 음반을 돌렸는데, 그동안 나는 노래에 흠뻑 취한 채 어릴 때의 부모님 곁에서 국문과 술자리로, 또 연극반 술자리로, 또 통기타 까페로 수없이 자리를 옮기며 옛 친구들을 만났다.
그리고 결국엔 샘스 부인도 만났다.
김보경/ 대학강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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