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물 흐르듯 흐른다. 보통은 어제와 오늘이 비슷한 잔잔한 강처럼 흐르지만 때로는 폭포처럼 앞과 뒤를 분명히 구분 짓는 사건이 터지기도 한다. 1941년 12월 7일의 진주만 기습이 그 하나의 예다.
지금 살아 있는 나이 든 미국인에게 선조들이 겪었던 진주만 급 사건을 하나 들라면 아마 대부분 1963년 11월 22일의 케네디 암살 사건을 꼽을 것이다. 이미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그 때 10대 이상이었던 미국인들은 아직도 그 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이 날은 케네디가 꼭 암살되어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미국 역사의 한 획을 긋는 날로 기억될 만하다. 60년대 초까지 미국은 지금과 비교하면 지극히 단순한 사회였다. 일반 가정의 경우 직장이나 학교에서 돌아와 저녁을 먹은 후 소일거리로 막 널리 보급된 흑백 TV를 보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그나마 채널이래야 CBS, NBC, ABC 3개뿐이었다.
남성의 98%는 취직을 했거나 일자리를 찾는 중이었고 여성의 80%는 집에 눌러앉아 살림을 했다. 대도시 일부 우범지대를 제외하고는 문을 잠그지 않고 사는 것이 보통이었고 범죄와 마약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거의 모든 남녀가 결혼을 했고 한번 결혼하면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았다. 이혼율 3.5%, 별거율 1%에 불과했다. 결혼을 하지 않은 미혼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TV 프로로 제작하는 것도 금지됐다.
그러던 미국은 60년대 중반부터 급속히 변화한다. 1965년 존슨 행정부 관리였던 패트릭 모이니헌(훗날 연방 상원의원)은 흑인 문제에 관한 보고서에서 흑인 가정의 미혼모 출산율이 24%에 이르렀다며 흑인 커뮤니티의 “위기”를 경고했다. 그 후 40여년이 지난 지금 흑인 가정의 미혼모 출산율은 71%다.
흑인만이 아니다. 모든 인종을 포함, 현재 미국 신생아의 41%가 미혼모한테서 태어나며 30대 이하 여성의 경우는 절반이 넘는다. 한 때 ‘사생아’로 사회적 지탄 받던 혼외 자녀가 이제는 미국의 주류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도덕관의 변화와 여성의 활발한 사회 진출, 남편이 없어야 보조금을 주는 정부의 웰페어 제도 등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런 가정에서 자란 자녀는 부모가 있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보다 현저하게 불리한 위치에 놓인다는 점이다.
모든 연구 보고서는 편부 편모 가정에서 큰 아이들은 학업 성취도가 낮고 범죄에 빠지기 쉬우며 자신도 편부 편모가 될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주고 있다. 부모가 둘이 있어도 애 하나 기르기 힘든 세상에서 혼자 기른 아이가 잘 크기 어렵다는 것은 상식이다. 편부 편모가 아니고 동거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경우는 조금 낫지만 동거 커플이 헤어질 확률은 결혼 커플의 2배에 달한다. 미국 이혼율이 50%니까 동거는 거의 깨진다고 보면 된다.
더 큰 문제는 미혼모 출산과 교육 수준이 반비례한다는 점이다. 대학 졸업 이상 학위를 가진 사람은 이 비율이 급속히 줄지만 고졸 이하의 경우는 대부분이다. 저학력, 저소득, 편부 편모와 고학력, 고소득, 부부가 있는 정상 가정으로 미국은 지금 양분되고 있다.
가장 뛰어난 사회과학자 중 하나인 찰스 머리는 최근 ‘파열’Coming Apart)라는 책에서 위에 기술한 문제점을 모두 적고 이를 방치할 경우 미국의 창업자들이 꿈꿨던 ‘모든 사람이 평등한 기회를 향유하는 사회’는 물 건너갈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고 있다.
공화당 대선 주자의 하나인 릭 샌토럼은 “신생아의 40%가 혼외에서 태어나는 등 미국 가정이 붕괴하고 있다”며 “정부 지출을 줄여 국채 문제만 해결되면 모든 것이 괜찮을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옳은 소리다. 사생아 대량 출산은 미국 사회의 근본인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는 불길한 신호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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