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캘리포니아서 출생. 그의 유년은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촉발된 미-일 전쟁의 와중에 어린 그는 콜로라도의 강제수용소에서 생활해야 했다. 일본계라는 이유에서다. 캘리포니아 세너제이 주립대에서 생물학과 스페인 어를 전공한 그는 과학교사로 인생을 시작했다. 공립학교 2곳에서 교장을 지내며 훌륭한 교육자로 평판을 얻었다. 1996년 그는 캘리포니아 주 하원의원에 당선되며 제2의 삶의 지도를 그려냈다. 그의 나이 55세의 늦은 나이였다. 지역 유권자들의 신망을 얻은 그는 2001년 드디어 연방 하원의원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어떤 한국인도 주목하지 않았을, 그저 평범한 일본계 하원의원으로 기억될 그가 우리에게 다가온 건 2007년 여름이었다. 연방 하원에서 ‘일본 종군 위안부 결의안’(HR121)을 주도해 통과시킨 것이다. 1997년 윌리엄 리핀스키 의원이 처음 발의한 뒤 레인 에반스 의원에게 넘겨져 모두 7차례나 발의됐지만 좌절됐던 결의안이었다.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그 역사를 바꾼 주인공은 바로 일본계 3세인 마이크 H 혼다((Michael Makoto Mike Honda) 의원이었다. 그는 결의안 통과까지 일본의 집요한 외교적 압력과 로비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모국의 치부를 앞장서서 까발린 그에게 일본에서는 “일본인의 얼굴을 하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혼다 의원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과감히 실천했다. 교단에서 학생들에게 진실한 역사를 가르치고자 했던 그에게 위안부 문제는 묵과할 수 없는 인권유린과 범죄행위였다. “위안부 문제 해결은 인종이나 국경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양심의 문제입니다.”그는 결의안 통과에서 자신의 역할을 끝내지 않았다. 한국을 방문해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나고 뉴저지 주의 팰리세이즈 파크에 세워진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를 찾는 등 변함없이 진실을 향한 노력을 경주해왔다. 그에게 위안부 문제는 “과거의 이슈가 아닌 현재의 이슈”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존엄성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이라도 일본 정부가 공식 사과하고, 후세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이 노(老) 정객의 앞길에 암운이 드리워지고 있다. 일본의 우경화는 동아시아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고 한때 소원했던 미일동맹은 다시 동아시아 경영의 핵으로 재부상했다. 지역구에서도 강력한 도전자가 그의 입지를 흔들고 있다. 인도계 변호사 출신의 젊은 경쟁자는 그의 몇 배나 되는 후원금을 모금하며 위세를 떨치고 있다. 의리 있고 정 많은 한인들이 그의 처지를 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캘리포니아와 뉴욕의 한인들은 재선 캠페인을 벌이며 그에게 힘을 보태고 나섰다. 워싱턴의 한인들도 일어섰다. 내일(20일) 저녁 7시 DC의 DNC 빌딩에서 후원의 밤 행사를 연다. 뜻 있는 이들이 나섰지만 아직 후원자들이 크게 부족하다고 한다. 수요일의 밤이 인간과 진실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가진 이들로 가득 차길 희망해본다. 연락처 (703)626-9018<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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