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가수나 연예계 종사자라고 모두 예술가는 아니다. 예술가는 인간과 삶, 또 그 세계를 이해하는 이들이다. 추상적이어서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고, 늘 예상을 벗어나 버리는 이 세상을 예술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해 구체적인 실체를 보여준다. ‘감동’이란 단어는 이들을 위해 아껴둬야 한다. 이 뻔한 이야기를 새삼 늘어놓은 이유는 한 배우 때문이다. 전도연, 이 배우는 몇 줄 글로 묘사돼 모호한 캐릭터를, 이 세계 어딘가에는 있을 법한 살아 숨쉬는 인간으로 살려낸다. 전도연은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기에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삶을 살 수 있다. 그가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을 그저 ‘연기’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하다. 그는 캐릭터를 살아낸다. 평범한 배우가‘흉내의 야금술(冶金術)’을 쓴다면, 전도연은‘이해의 연금술(鍊金術)’을 쓴다. 거기서 감동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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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무뢰한’(감독 오승욱)에서 전도연은 그랬다. 그가 아니었다면, 관객은 김혜경을 그저 밑바닥 삶을 사는 또 하나의 캐릭터로 뭉뚱그려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김혜경은 ‘무뢰한’과 같은 장르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전형적인 인물이니까. 하지만 전도연의 김혜경은 기어코 관객의 마음을 친다. 김혜경의 미세한 표정 변화, 언뜻 무의미해 보이는 몸짓과 걸음걸이, 내던지는 한 마디 대사에도 전도연이 담겨있다.
형사 정재곤(김남길)은 사람을 죽이고, 도망 중인 박준길(박성웅)을 잡아야 한다. 그를 잡을 방법을 궁리하던 중 정재곤은 박준길에게 애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 때 ‘텐프로’ 술집에서 잘나갔지만, 나이 먹고 빚도 져 지방 단란주점 새끼마담으로 전락한 김혜경. 정재곤은 김혜경에게서 박준길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김혜경이 일하는 단란주점 영업부장으로 위장잠입한다.
‘무뢰한’은 최근 한국영화계가 지겹게 재생하고 있는 그저 그런 영화들 틈에서 오랜만에 눈길을 끄는 의미있는 작품이다. 이야기가 깊고 다층적인 데다 화법도 흥미로워 보고 나면 한동안 머릿속을 감도는 매력이 있다. 문제는 ‘무뢰한’의 연출이 오승욱 감독의 야심을 못 채우고 있는 점이다. 이야기 자체가 불편하게 다가오는데, 각본이 치밀하지 못해 영화에 대한 접근이 어려운 면이 있다. 표현이 과해 인물이 간혹 나르시시즘에 빠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전도연과 김남길의 연기가 이 모든 단점을 만회한다.
전도연은 영화가 감독의 예술이라는 말을 온몸으로 부정한다. 그 만이 보여줄 수 있는 깊이로 ‘무뢰한’을 떠받친다. 그는 버림받은 반려동물 같은 김혜경을 때론 살쾡이처럼 사납게, 때론 고양이처럼 예민하게, 때론 강아지처럼 온순하게 연기한다. 더 놀라운 건 이런 감정 변화가 연기 테크닉의 나열이 아니라는 것. 인간은 어느 한순간도 똑같은 감정을 가질 수 없다는 걸 이해하는 듯한 그는 매 순간 다른 감정이 담긴 눈빛을 보인다. 심지어 무표정에도 감정을 싣는다. ‘무뢰한’에서의 전도연의 연기에 쏟아지는 찬사는 과장이 아니다.
김남길은 스스로 밝힌 것처럼 ‘무뢰한’이 연기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의 연기는 수준급이지만, 다소 과장된 표정과 극적인 목소리 변화에 의존해왔다. 하지만 정재곤은 김남길이 이전의 연기 방식으로는 소화할 수 없는 배역이었다. 그는 한 단계 진화한 연기를 선보이기 위해 과거의 방식을 벗어던졌다. 삐딱하게 축 늘어진 몸, 어딘가를 무심히 쳐다보는 눈빛은 삶에 지친 정재곤을 과장 없이 보여준다.
‘무뢰한’ 앞에 붙은 하드보일드 멜로라는 수식어는 적절해 보인다. ‘무뢰한’은 관계의 하드보일드, 사랑의 하드보일드다. 그리고 그 비열한 거리를 당당히 걸어가는 명예로운 남자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김혜경과 정재곤은 기어코 각자 자신의 삶을 살 것이다. ‘무뢰한’이 흔한 눈물 한 방울 없이도 관객을 울릴 수 있는 건 이 때문이다.
<손정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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