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113주년]하와이의 제주사람 이야기(1) [이민113주년]하와이의 제주사람 이야기(1)](http://image.koreatimes.com/article/2016/01/07/20160107184050561.jpg)
<사진설명: 1916년경 강한준 가족>
본보는 매년 1월이면 미주한인의 날에 즈음해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장의 하와이 이민연구사를 연재하고 있다. 이민113주년을 맞는 병신년에는 '하와이의 제주사람 이야기' 원고를 게재한다.
이승만이 1904년 8월 9일에 한성감옥에서 출옥하면서 곧 상동감리교회 (전덕기 담임목사) 청년회에서 준비하고 있는 상동청년학원 조직에 참여하게 되었고, 학원의 방향 설정과 체재 구축에 심혈을 기울이며 재정확보에도 노력하였다. 이승만은 <상동청년회의 학교를 설시함> 이라는 제목의 글을 작성하여 《신학월보》에 기고했고, 상동학원이 10월 15일에 개원되면서 초대 교장으로 부임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갑자기 11월 4일에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고, 그의 기고문은 《신학월보》 11월호에 실렸다. 이승만은 그의 기고문에 상동청년학원의 목적과 어떻게 이 학원을 설립하게 되었는지 등을 자세히 설명했다. 또한 이 학원을 위해 한국에 있는 일본인과 중국인도 연조했고 또 멀리 외국에 있는 친지들이 찬조금을 모아 보냈다고 기록했다. 그 중에 ‘하와이에 유학 (거주)하는 친구도 어려운 돈을 불소(不少)히 연조’하였다고 했는데, 누구인지와 액수는 밝히지 않았다.
이 기록이 하와이 이민자가 고국의 교회활동 내지는 교육활동에 보낸 첫 번째 후원 기록이다. 참고로 상동학원은 1913년 11월에 제7회 졸업식을 끝으로 폐원되었다. 상동학원 개원으로 부터 10년 후 하와이의 대한부인회 (1913년에 조직)가 1914년에 5월에 평양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노불(William Arthur Noble) 목사를 통하여 서간도의 재난동포에게 구제금 $300을 보냈다. 또한 1918년에는 하와이에서 목회하다가가 환국한 김유순 목사를 통하여 250달러를 보내 황해도에 땅을 사서 이 땅에서 걷는 추수수입으로 한국내의 지방 전도사업에 충당하도록 했다. 대한부인회 이외에 개인으로 고향의 교회를 위해 보조금을 보낸 사람은 제주도 출신 강한준(康漢俊)이다. 강한준이 1917년 6월에 전라남도 장로교노회 (전남노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당시 제주도는 전라도 관할), 자신의 고향 법환리에 있는 친족들에게 전도해 달라면서 매해 60달러씩 5년간 보조금을 보내겠다고 했다.
전남노회는 곧 법환리에 전도인을 보내 전도를 시작했고, 계속하여 2~3명 전도인을 보내 꾸준히 전도활동을 했다. 신자수가 증가하면서 신매선이라는 부인의 집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1922년에 강한준이 보낸 총 325달러로 82평 (약 3000 평방피트)의 땅과 방 2개와 부엌이 있는 초가집 2채를 샀다. 이것이 법환교회 소유의 첫 예배당이다. 입항자 기록에 강한준은 24세 (1879년생)로 기혼이었고 마지막 거주지가 인천으로 되어 있는데, 1903년 10월 5일에 홀로 하와이에 도착하여 마우이 섬 파이아 농장으로 갔다.
제주에서 1901년 5월 말에 관노(官奴) 이재수가 약 300명의 천주교도를 살해하여 체포되었고 7월 18일에 서울로 압송되어 10월 9일에 처형되었다 (<이재수의 난>이라는 영화의 배경 이야기). 강한준이 이 사건과 연관되어 제주를 떠나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강한준이 1901년에 배를 타고 인천으로 피신했다가 그 곳에서 미국 선교사들을 만났고, 하와이 이민에 관하여 알게 되면서 하와이로 왔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강한준 이외에 제주 사람으로 하와이에 이민 온 사람은 약 90명으로 이름을 확인했는데 좀 더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민 초기에는 마지막 거주지를 서울, 제주, 수원 등 큰 지역 이름으로 기입했으나, 후기에 이르면 마을 이름을 기입한 사람이 많고, 같은 이름의 마을 이름이 전국에 많기 때문에 제주의 마을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어 제주인 명단에서 제외했기 때문이다.
1903년 1월 13일 이민 첫 배에는 제주 사람이 한 명도 없다. 3월 3일에 도착한 두 번째 이민선으로 온 고행준은 10여년 정도 머물다가 제주도로 돌아갔다. 그의 조카는 고행준이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미군정 (1945-1948) 당시 통역활동을 했다고 전했다. 1903년 12월 28일에 도착한 25세의 고병관은 샌프란시스코로 재 이민을 간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된《공립신보》 1908년 4월 22일자에 〈보통교육은 신문이 필요 함〉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기고했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내 나라를 지키려면 국민들의 보통교육이 필요하며, 국민의 보통교육을 위하여는 신문이 필요하다. 내 고향은 제주인데, 내가 노동으로 번 돈으로 석달 치 신문대금을 내고 제주에 있는 신사들에게 이 신문을 보내니 잘 읽고, 석 달 후에는 직접 신문사로 신청하여 보기 바란다.’ 이 신문을 받은 사람들은 제주 성내 병문동에 사는 금릉위 (당시 제주에 귀양왔던 박영효) 이외에 9명이었다.
현 연방상원 의원 메이지 히로노의 시어머니 로즈메리 김 오시마는 1904년 7월 8일에 도착한 제주인 김영선의 딸이다. 김영선은 1916년 3월에 여권을 발급받아 부산의 김순필을 데려와 결혼했고, 사진신부 김순필은 부산의 여동생을 데려다 결혼시켰다. 로즈메리 김 오시마는 자녀들에게 ‘김’이라는 중간 이름을 주어 한국인임을 기억하게 했다.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다음 주에 계속>
![[이민113주년]하와이의 제주사람 이야기(1) [이민113주년]하와이의 제주사람 이야기(1)](http://image.koreatimes.com/article/2016/01/07/20160107184050562.jpg)
<사진설명: 파이아 교회. 윗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강한준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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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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