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짙은 향의 복숭아꽃, 살구꽃이 진달래꽃과 어우러져 피어나는 풍경은 한반도의 흔한 봄철 모습이다. 화사한 분홍으로 산하를 물들이며 피어나는 꽃은 고향의 이미지가 덧대어지고 아련한 기억을 자극하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한반도 전역에서 찾아볼 수 있는 복숭아 나무는 꽤 오래 전부터 역사에 등장했다. 본래 원산지는 중국 황하유역으로 알려져 있는데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기록으로 보아 한국에는 기원 전후에 전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눈길을 사로잡는 꽃의 자태는 물론이고, 늦여름의 향긋한 과실 덕분에 복숭아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권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복숭아 관련 설화는 도교(道敎)의 서왕모(西王母) 신화이다. 신선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여신 서왕모는 반도원(蟠桃園)이라 불리는 복숭아 과수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3,000년에 한 번 열매를 맺는다는 반도(蟠桃)가 열매를 맺으면 모든 신선들을 초대하고 연회를 베풀며 복숭아를 나눠먹었는데, 이를 통해 반도는 불로장생(不老長生)하는 신선들의 과일이자 장생(長生)의 영약을 상징하게 되었다. 반도로 대표되는 복숭아의 상징체계는 춘추 전국시대 이후 동아시아에 급격히 자리잡은 도교의 성행으로 널리 확산되었고, 소설 서유기(西遊記)의 주인공 제천대성(齊天大聖) 손오공(孫悟空)이나 삼천갑자(三千甲子, 약 18만년)를 살았다는 전설의 동방삭(東方朔) 등이 서왕모의 복숭아를 훔쳐먹고 장생을 누린 이들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복숭아 열매가 신성한 선도(仙桃)로 여겨졌다면, 복숭아 꽃나무는 신선이 사는 선경(仙景), 나아가 이상향을 상징했다. 중국 남조시대 이름을 떨친 문인 도연명(陶然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는 복숭아 꽃나무의 상징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후난성(湖南省) 무릉(武陵) 지역의 어부가 길을 읽고 헤매고 있었는데 복숭아 꽃이 만발한 숲을 따라 도착한 곳에서 시간이 멈춘 듯 평화로운 낙원을 발견했다. 며칠간 꿈같은 시간을 보낸 어부가 다시 그 곳을 찾으려 했지만 두 번 다시 발견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도연명의 글은 자연과 함께하지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별천지 공간을 묘사하며 번잡한 속세를 떠나 은닉하고 싶은 선비들의 이상향을 구체화시켰다. 이 때, 복숭아 꽃나무는 낙원의 아름다운 풍광을 시각적으로 묘사하는 장치 뿐 아니라, 선계와 세상을 구분하는 경계의 역할을 했다. <도화원기> 이후 복숭아 꽃으로 둘러싸인 신비한 장소는 무릉도원(武陵桃源)으로 불리우며 시나 문학, 회화 작품 등에서 다뤄졌고, 자연스럽게 복숭아 꽃이 만발한 장소는 이상적인 낙원을 상징하게 되었다.
상서로운 의미를 지닌 복숭아 꽃과 열매는 많은 문학가와 예술가의 지속적인 사랑을 받았다. 신선의 세계를 암시하며 화사한 분위기를 내는 복숭아 꽃은 시와 회화에서 즐겨 다뤄졌고, 구체적인 형태를 갖춘 복숭아 열매는 공예품의 소재로 환영받았다. 특히 다양한 문방구류가 성행했던 조선 후기에는 다종다양한 도자 연적의 제작에 힘입어 복숭아형 연적이 다수 제작되었다. 둥그스름하여 한 손에 쥐기 쉬운 복숭아형 연적은 줄기를 또아리 삼아 그 위에 탐스럽게 익은 복숭아가 올라 앉은 모습이다. 봉긋하게 솟은 복숭아 끝에 하나, 몸통의 중앙을 타고 곧게 올라온 굵은 줄기 하나에 뚫린 구멍은 각각 물구멍과 공기구멍으로 고안되었다. 선비들의 사랑방에서 실용과 감상의 기능을 동시에 충족시켜 주었던 이 연적 속에는 먹을 가는데 필요한 맑은 물 뿐 아니라 신선과 같은 삶을 꿈꾸는 이들의 바람이 담겨 있다.
<이미지 정보>
Peach-shaped Water Dropper
Korea, Joseon dynasty(1392-1910), 19th century
Porcelain with iron glazeGift of Damon Giffard, 1947 (488.1)
백자철채 복숭아형 연적
조선시대 19세기
1947년 데이먼 기파드 기증 (488.1)
오 가 영
호놀룰루미술관 아시아부 한국미술 담당
한국국제교류재단 파견 객원 큐레이터
<고송문화재단 후원>
<
오가영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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