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북한의 4차 핵실험에 대한 대응조치로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했다. 그 방송에는 가수 이애란의 히트곡인 ‘백세인생’도 포함돼 있다. ‘백세인생’은 25년간 무명가수로 살던 한 여가수가 오십이 넘어서 불러 대박을 터뜨린 노래다. 저승사자를 조롱하는 듯한 경쾌한 박자와 선율에다 코믹한 노랫말이 하루아침에 유명세를 탔다.
저리 막무가내로 백세까지 버티겠다고 해도 되는 건지, 저승사자가 괘씸죄나 능멸죄로 먼저 끌고 가지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죽기만 싫은 게 아니라, 학교도 가기 싫고, 군대도 가기 싫고, 출근하기도 싫은 보통 사람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가사를 패러디하기에 바쁘다.
‘육십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 구십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알아서 갈 테니 재촉 말라 전해라’라는 재치 넘치는 가사는 ‘알아서 갈 텐데 또 왔냐고 전해라/ 극락왕생할 날을 찾고 있다 전해라/ 나는 이미 극락세계 와 있다고 전해라’로 이어 진다.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저승사자가 가벼운 조롱의 대상이라도 된 듯 저절로 웃음이 난다. 꼼짝 못하고 억눌려 지냈던 죽음이란 거역할 수 없는 운명과 한 판 맞장이라도 뜨는 기분에 유쾌해지는 게다.
이 노래를 유튜브에서 들은 네티즌들은 이구동성으로 ‘공감한다 전해라’ ‘전립선암이 다 나았다고 전해라’ 등등의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모두 저 세상에 가는 시기를 우리가 선택할 수도 있다는 자신감에 우쭐해서 말이다. 이제는 죽음도 피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숙명이 아니라, 능동적인 관리의 대상임을 선언한 노랫말에 공감하는 것이다.
이런 심리의 저변에는 그동안 억울해도 한마디 항변도 못한 채 꼼짝 못하던 저승사자에게 더 이상 끌려 다니지 않겠다는 저항정신이 깔렸다. 이래저래 건강과 장수는 21세기 들어 누구나 쉽게 추구하고 누릴 수 있는 혜택이 되었다. 하지만 과연 장수는 축복인가.
잔인한 것 같지만, 대부분의 간호사는 제니퍼가 아직도 살아 있단 사실이 믿기지 않는 얼굴이다. “아직도 살아 있니?(She’s still alive?)” 중환자실에 다녀온 내게 병동 동료가 물어본다. 꼬리뼈엔 욕창이 나 있고 왼쪽 다리는 엉덩이 바로 아래에서 절단된 채 몸통만 뒹굴뒹굴하면서도 제니퍼는 아직 정신이 멀쩡하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다. 두서너 달 전에 가보니 그녀의 방에는 책 읽어주는 여자가 있었다.
병동은 점점 넓어지고 간호사 얼굴 보긴 점점 어려워지는데 제니퍼처럼 나이 들고 병든 환자들은 혼자 침대에 누워서 천천히 죽어갈 운명이다. 장수한다는 것은 어쩌면 혼자서 병실을 오래도록 지키다가 혼자 죽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아니 혼자가 아니다. 기계와 같이 살다가 죽는 것일 게다.
과연 장수는 축복인가, 아니면 재앙인가 하는 의문을 안고서 무병장수에 관한 책을 읽었다. ‘몸과 마음과 섭생(Body, Mind & Food)’이란 책은 캐나다의 유종수 교수가 쓴 건강지침서다. 과연 21세기 초 인간은 섭생(diet), 신체 활동 그리고 스트레스에서 생기는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여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책은 이런 질문을 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결론을 내리기엔 아직 이르다”라고 그 답을 유보한다. 그러나 적어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인간은 이런 변화의 여파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그 노력과 방법론을 담고 있다.
개똥밭을 뒹굴어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개똥밭도 개똥밭 나름이다. 휠체어에 앉아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병실 문을 바라보며 십 년, 이십 년을 연명해야 한다면 오래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제는 삶의 질을 생각해야 할 때다. 백세 넘어 살되, 활기차고 의미 있게 사는 법을 놓고 고민할 때이다. 올해는 “아직 팔팔해서 병원 갈 일 없다고 전해라”는 말을 주변 어르신들한테서 많이 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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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복현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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