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회화의 주요 소재는 사람과 자연이었다. 특히 사람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시작된 인물화(人物畵)는 문자가 온전히 담아 내지 못한 인물의 정서, 사상, 풍습 등을 기록하고 전달하는 자료로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일반적으로 인물화는 특정 인물을 그린 그림과 일반적인 사람들을 그린 그림으로 구분되는데, 특정 인물을 다룬 그림은 널리 알려진 텍스트를 토대로 하는 그림과 대상 자체의 표현에 집중한 그림으로 다시 나누어진다. 종교와 관련한 인물, 혹은 고사(故事)에 등장하는 인물을 다룬 인물화가 전자에 해당한다면 일반적인 초상화(肖像畵)가 후자에 해당한다.
초상화는 보통 특정 인물의 모습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 교훈을 주는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중국이나 한국 등에서는 전신화(傳神畵)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단순히 대상의 겉모습을 묘사[寫形]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묘사[寫心]하여 인물의 정신까지 옮겨 그리는 것[傳神]을 초상화의 목적으로 삼았다는 의미이다. 즉 한 사람을 그림으로 그려낼 때, 보이는 외관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까지 담아내야 온전한 표현이 이루어진다고 여겼던 것이다.
한국에서 초상화가 가장 성행하고 발달했던 시기는 조선시대였다. 조선 초기에는 임금의 초상화를 그린 어진(御眞), 나라에 공이 있는 인물들을 그린 공신상(功臣像) 등이 다수 제작되었고, 후기에는 일반 사대부상(士大夫像)까지 널리 그려졌다. 조선시대 초상화에서는 특징적인 표현 기법이 사용되었는데, 배채법(背彩法)과 육리문법(肉理紋法) 등이 대표적이다. 배채법은 채색이 너무 과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도록 화면 뒤쪽에서 색을 입히는 기법이고, 육리문법은 세필을 사용한 붓질로 피부 조직을 표현하는 기법이다. 피부결의 촉감까지 묘사하는 육리문법은 특히 조선 후기에 유행했는데, 안면의 검버섯은 물론 주름의 패임 정도까지 치밀하게 묘사하여 사실주의에 뿌리내리고 있는 조선시대 초상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조선시대 이름을 알린 초상화가 중에는 20세기를 전후하여 70여점 이상의 초상화를 남긴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이 있다. 석지(石芝), 석강(石江), 정산(定山) 등의 호를 썼던 채용신은 고종황제 어진을 비롯하여 흥선 대원군 이하응(李昰應), 의병장 최익현(崔益鉉) 등의 초상을 남겼다. 현재 전해지는 채용신의 초상화는 대부분 정면상을 하고 극세필로 얼굴을 묘사한 것이 특징인데, 대상의 얼굴이나 옷주름 표현에서 서양화풍의 영향을 받은 음영법을 찾아볼 수도 있다.
호놀룰루 미술관에도 조선시대 초상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채용신의 작품 1점이 소장되어 있다. 오사모(烏紗帽)라고 불리는 모자를 쓰고, 단령(團領)이라 부르는 관복을 입은 그림의 주인공은 호피가 깔린 의자에 앉아 한 손에는 안경을, 한 손에는 부채를 쥔 모습이다. 옷 위로 모습을 드러낸 호패(號牌)에는 이름 끝자와 계해(癸亥)년 생이라는 정보가 적혀있고, 화면의 오른쪽 상단에는 오연필(吳然必)의 70세 초상임을 밝히는 표제가 쓰여있다. 화면 왼편에는 임신(壬申)년 5월 상순 종2품 채석강(채용신)이 그렸음을 밝히는 내용까지 적혀있어, 1932년, 채용신이 오연필의 70세 모습을 그린 작품이라는 정보가 밝혀졌다. 오연필에 대해서는 많은 정보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신까지 전한다는 그의 초상화를 마주하니, 백발이 성성한 중에도 형형한 눈빛에서 쏟아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은 느낌이다.
<이미지 정보>
Portrait of Oh Yeon-pil with Official Wearing Crane Badge
Chae Yong-sin (1850-1941)
Korea, 1932 color on silkGift of Hattie Higa, 1993 (7504.1)
오연필 초상
채용신(1850-1941)
1932년 비단에 채색1993년 하티 히가 기증 (7504.1)
오 가 영
호놀룰루미술관 아시아부 한국미술 담당
한국국제교류재단 파견 객원 큐레이터
<고송문화재단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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