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간의 화제를 모으며 발간된 하퍼 리의 두 번째 소설 ‘가서 파수꾼을 세워라’는 그 때까지 작가의 유일한 소설이었던 ‘앵무새 죽이기’처럼 재미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세계 대전 후의 미국 사회를 이해하는데 이만한 텍스트가 드물다는 생각이 들어 탐독했다. 그리고 이 소설을 바탕으로 이해한 미국의 모습은 트럼트 시대의 개막과 그 후폭풍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남북전쟁 시대까지 사실 남부 백인들의 95퍼센트는 노예와 별 상관이 없이 살았다. 그들은 흑인과 별 차이 없이 가난하고 무지했다. 그들은 ‘백인 쓰레기’(white trash)라고 불렸으며, 이 사람들이 남북전쟁에서 싸운 까닭은 노예제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부다움’의 생활양식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링컨 대통령의 내전의 목적도 노예해방이 아니라 나라가 두 쪽으로 갈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더구나 서부의 많은 지역은 그때까지만 해도 일종의 씨족사회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피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집성촌이고, 그래서 자연히 ‘다름’에 낯을 가렸다.
생활은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교회를 나가지 않으면 문제가 있는 거고, 가톨릭교도면 그 또한 문제였다. 가톨릭 학교에서는 흑백분리를 지키지 않았고, 그래서 KKK의 활동 대상에는 가톨릭교회도 포함돼 있었다.
‘예수를 죽인 유대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것은 아니었다. 마을의 ‘Grand Dragon’, 즉 KKK 대장이 누구인지 뻔히 알아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흑인 인구가 위협적으로 늘어난 데다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흑인 군인들이 돌아오면서 새로운 사회문제가 등장했다. 세계를 직·간접으로 경험한 똑똑한 흑인들이 조직적인 저항을 시작한 것이다. 종래의 당연시되던 흑백분리가 흔들리면서 백인들 사이에서는 인종차별을 두둔하려는 이상한 논리가 판을 쳤다. 하느님은 여러 인종이 서로 떨어져 살기를 바라는데, 그렇지 않다면 같은 피부색의 인간들만 만드셨을 거라고 했다.
‘분리는 평등’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런 논리가 안 통하면 감정 밑바닥의 두려움에 호소했다. “여러분의 딸들이 같은 반에서 공부한 ‘깜둥이’의 아이를 갖기를 원하느냐”는 식이었다. 부모들에게 자신의 자식들이 ‘깜둥이’와 사랑에 빠지는 것보다 더 큰 공포는 없었다.
당시 부의 분배와 저소득층의 의료혜택을 주장했던 루이지애나 주지사 휴이 롱은 암살되었다. 흑인을 두둔한다는 이유로 루즈벨트 여사도 비난의 표적이 됐다. 소설로 돌아가 보면, ‘앵무새’에서 흑인의 재판을 도와주었던 애티커스는 ‘파수꾼’에서는 그들을 도와주지 않는다.
이에 격렬하게 항의하는 딸에게 그는 자기 세대의 의식의 확장은 거기까지가 한계임을 암시한다. 이제 바톤은 딸의 세대로 넘어갔고, 남은 과제들은 이제 후대의 방식으로 새롭게 해결돼 나가야 한다.
소설에는 마치 예언처럼 이런 말이 나온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언젠가 정부가 괴물 같아져서 가장 힘이 약한 사람을 짓밟을 거라는 거야.”역사는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진퇴를 거듭하며 조금씩, 아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지금은 진의 시대일까, 퇴의 시대일까? 국민 각자의 양심과 정의감과 선함에 파수꾼을 제대로 세워두지 않으면 결국 모두는 퇴의 시대를 맞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란 원래 그런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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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국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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