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에 아이 둘을 모두 대학으로 떠나보낸 후 이제 내가 부모로서 해야 할 큰 부분을 마쳤다고 생각했다.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올 때면 가사노동이 늘지만, 일단 한번 집을 떠난 아이들은 어느덧 손님이 되어 빨래나 설거지, 라이드 등이 이미 내 손을 떠나 예전보다 수월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는 선배들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 진담인 것을 실감한다.
큰 녀석은 집을 떠난 지 3년이 다 되어가는 데, 집으로 돌아오고 떠나기를 반복하면서 조금씩 단단해지고 속이 영글어가는 모습에 감사하다. 대학 1학년인 작은 아이는 본인이 아직 멀리 떠날 마음의 준비가 돼있지 않다며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학교를 가서 가끔 집에 오거나 우리가 찾아가 시간을 보내곤 한다.
그런데, 지난 봄방학 때 집에 와서 저녁을 먹던 작은 녀석이 침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엄마, 머리에서 자꾸 어떤 소리가 들려.”“이건 또 무슨 말이지? 머리나 귀에서 환청이 들린다는 거야?”심리상담사 엄마의 과장 반응에 아이는 피식 웃으며 “그게 아니고 마음에서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지’란 생각이 자꾸 올라와”라고 했다.
순간 머리가 멍해지고 가슴이 바닥에 내려앉았다. 상담실을 찾는 사춘기 아이들에게 자주 듣는 말을 나의 아이가 하고 있었다. 10학년이 돼서 늦게 사춘기 문턱에 들어서더니 지금도 여전히 정체성을 찾는 사춘기의 안개 속을 걷고 있었다.
고등학교까지 열심히 믿던 신앙관이 흔들리며 ‘나는 누구며 왜 살고 있지’란 근본적인 질문 앞에서 종종 허무와 혼란함을 느낀다고 했다. 다행히 학교 공부는 따라 갈만 하고 우울할 때면 체육관에 가서 농구를 두세시 간씩 하며 스트레스를 푼다니 감사했다.
그런데, 아이가 대화 중에 던진 질문이 내 머리를 심하게 때렸다.
“엄마 아빠한테 불평하는 말이 아니라 너무 궁금하고 혼란해. 어떻게 ‘사랑해’ 말을 하면서 애들을 그냥 내버려두고 시간을 같이 안 보내지?”순간 너무 당황스러웠다. 초등학교까지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으나 아이가 6학년이 될 때 나는 상담대학원을 시작하여 일과 공부를 병행했고, 남편도 하루에 12시간 넘게 일하고 주말엔 운동을 하며 애들과 보내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사춘기 애들은 친구가 중요하니까 부모랑 시간 보내는 걸 원치 않을 거야’라고 어림짐작하며 애들과 시간을 많이 갖지 못했었다. 아이가 “사랑하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거 아닌가?”라고 고개를 갸웃거릴 때 말할 수 없는 미안함과 죄책감이 밀려왔다. 작은 아이의 사랑의 언어는 ‘시간을 함께하는 거’였는데, 상담사인 엄마가 이제야 알아챈 것이 부끄러웠다.
“그랬구나. 너무 미안하다. 엄마는 네가 혼자 있고 싶어 해서 존중한다고 그냥 둔거 같아.”“덕분에 저는 독립적이 된 거 같아요. 아직은 내가 사춘기라 같이 있고 싶기도 하다가 혼자 있고 싶기도 해요. 사춘기 끝나면 함께하는 시간을 좀 더 많이 가질 수 있을 거예요.”이 일이 끄나풀이 되어 봄방학 일주일 동안 작은 애와 소통하며 마음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다른 청소년 내담자들에게 해주던 말을 나의 아이에게도 같은 조언으로 격려하고 지지할 수 있어서 직업이 심리상담사인 게 참 감사했던 한 주간이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시간을 같이 보내고 추억을 함께 엮어가는 것’이란 평범하지만 소중한 깨달음을 다시 일깨워준 아이. 자녀들의 말에 부모가 귀를 조금만 기울이면 그들이 우리를 반추하는 거울이며 우리의 선생님인 것을 다시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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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카 이 심리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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