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나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준 책은 셰익스피어나 도스토옙스키 같은 대문호의 작품이 아니라, 덴마크의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The Little Match Girl)’ 이다.
살을 에는 듯이 추운 섣달그믐날 성냥을 팔려고 꽁꽁 얼어붙은 거리를 헤매는 어린 소녀가 있었다. 아무도 사주는 사람이 없는 거리를 헤매다가, 소녀는 추위를 피하기 위해 골목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성냥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인다. 불꽃이 피는 순간 소녀는 부잣집 상에 차려진 성찬의 환상을 보고, 또 한 개비 불을 붙여서는 크리스마스트리 밑에 쌓인 화려한 선물을 본다. 마지막 성냥불에서 자기를 사랑했던 돌아가신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할머니, 나를 할머니 곁으로 데려다 주세요” 라고 애원하며 서서히 얼어 죽는다.
다음날 아침 얼어 죽은 소녀의 시체를 보면서 사람들은 ”쯧쯧, 성냥불로 몸을 녹이려고 했구먼…” 하면서 지나간다. 어린 소녀의 비참한 죽음과 어른들의 무관심한 반응에서 받았던 충격은 오랜 세월 바래지 않은 채 나의 의식 속에 깊이 새겨져있다.
이 동화가 발표된 지 100년 후인 1950년에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어느 시대에나 마찬가지로 전쟁의 가장 큰 희생자들은 어린애들이다. 3년 이상을 끌었던 전쟁 중에 수많은 어린애들이 목숨을 잃거나 고아가 되어 길거리에 버려지는 비극이 계속되었다.
같은 한 세기 동안 유럽과 미국에서는 사회정의를 바탕으로 한 복지정책이 도입되면서, 적어도 한겨울에 거리에서 아이들이 굶어죽거나 얼어 죽도록 내버려두는 비극은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많은 미국, 유럽의 가정에서 인종과 문화가 다른 ‘남의 애들’인 한국전쟁 고아들을 입양해 훌륭한 사회인으로 키워주었던 것은 바로 이 인도주의 복지정책의 덕택이다.
한국전쟁 후 다시 7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 수많은 ‘남의 애들’을 기꺼이 품에 안고 사랑으로 길러주었던 모범적 인도주의 나라, 미국이 놀랍게도 ‘남의 애들’ 배척 운동을 펴는 실망스러운 나라로 변하고 있다.
최근 한 백인 하원의원이 “우리의 문명을 부흥 시키려면 출산율을 높여야 하고, 태어나는 아이들에게 우리의 가치와 문명을 가르쳐야 한다. ‘남의 애들’을 데리고 이 중요한 과업을 성취 할 수 없다.” 라고 공언하였다. 그가 말하는 ‘우리’와 ‘남의 애들’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남의 애들’에 대해서 우호적이었던 나라가 왜 이제 와서 배척의 길을 선택했을까? 우선 떠오르는 이유가 동정심 피로증이다. 해변에 엎드려 죽은 3살짜리 난민소년의 사진, 이런 비극에도 아랑곳없이 계속 몰려드는 난민들, 세계 각처에서 굶어죽는 아이들의 모습에 매일 노출되면서, 동정심 피로현상이 일어나고, 차츰 불운한 사람들에 대한 혐오감과 배척이 싹 텄을 수 있다.
둘째는 지난 수세기 동안 넘쳐나던 자기네 곳간이 ‘남의 애들’ 때문에 점점 비어가고 있다는, 상상과 사실이 뒤섞여 생긴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부유한 나라로 향하는 ‘남의 애들’의 행렬은 지구상에서 절대빈곤이 사라지지 않는 한 끈질기게 계속될 것이다. 현대판 성냥팔이 소녀들과 시리아 난민 소년들의 비극을 방지하려면, 인류의 가장 큰 도전인 가난구제를 실현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이다. 역사상 한번도 실현되지 못했던 가난구제가 언젠가 이루어 질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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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진 / 교육심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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