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안홍균의 ‘코리아 게이트’증언 6
하원 프레이저위원회의 프레이저 위원장(뒷줄 오른쪽 세 번째)과 젊은 학자들로 주로 구성된 한미관계 조사팀의 멤버들.
본보는 코리아 게이트에 관한 안홍균 씨의 증언을 기획 시리즈로 연재한다. 안 씨는 이번 증언을 통해 코리아 게이트를 둘러싼 한미 간의 숨막혔던 긴장과 갈등의 역사적 시간들을 재구성할 예정이다. 또 그가 가까이에서 지켜본 박동선, 김형욱, 김한조와 김상근, 손호영 등 코리아 게이트의 주역에 관한 숨은 스토리와 에피소드들도 소개한다.
-하원 윤리위 예산 53만불 통과
하원 윤리위원회(Ethics Committee)는 코리아 게이트를 위해 신설된 조직이 아니라 기존 상설기구의 하나였다. 공식 명칭은 ‘공무수행기준위원회(Committee on the Standard of Official Conducts)’이다.
윤리위는 민주 6명, 공화 6명 등 모두 12명의 하원의원으로 구성돼 있었다. 위원장은 남부 조지아 출신의 존 플린트 의원이었다. 동료의원들을 징치해야 하는 역할이 달가울 리 없었지만 부득이 그는 맡아야 했다. 당시 보수적인 정치풍토의 남부에서는 다선의원이 많았다. 따라서 상임위원장도 다선이 맡는 관례에 따라 그에게 역할이 부여된 것이다.
윤리위가 코리아 게이트 조사에 사용할 최초의 예산은 53만 달러였다. 제95 의회 회기가 끝나는 78년 12월말까지 사용할 예산으로 하원에서 역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누구 하나 토를 달고 반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 후 윤리위 예산은 추가 편성됐다.
윤리위에 주어진 소임은 첫째, 모든 하원의원들의 부정행위를 조사하는 것. 둘째, 미 의회의 자정능력을 보여주는 것. 셋째, 조사를 통해 문제점을 찾아내 새로운 법을 제정한다는 것이었다.
-29명의 특검팀 구성
조사의 3대 타깃은 박동선과 김한조, 김동조 주미 한국대사였다. 윤리위원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권한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산하에 특별조사위(Special Staff)를 발족시켰다. 오늘날의 특검팀이었다.
특검팀은 특별검사(Special Counsel) 1명, 검사 7명, 정보분석관 1명, 조사관 10명, 행정요원 9명 등 총 29명으로 구성됐다. 나는 통역을 맡았지만 그 뒤에 정보 분석 임무도 함께 했다.
특검팀을 진두지휘할 특별 검사에는 처음 필립 라코바라가 임명됐다.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 특별검사의 법률 자문관으로 활동했던 사람으로 7월에 사임하고 말았다. 그러자 오닐 하원의장이 나서서 그 후임에 레온 재워스키(Leon Jaworski)를 임명했다.
재워스키는 텍사스 출신의 변호사로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백악관의 비밀 녹음테이프를 입수해 닉슨 전 대통령의 사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특별검사였다. 그는 닉슨에 의해 파면된 초대 워터게이트 특별검사 아치볼드 칵스(Archibald Cox)의 후임으로, 워터게이트 사건을 끝까지 파헤치며 미 국민들의 신망을 얻었다. 재워스키가 합류함으로써 코리아 게이트 사건 조사는 활기를 찾게 됐다.
-정예 수사관들 차출
특검팀은 미 전국에서 선발된 정예요원들로 진용을 갖췄다. 뉴욕 주의 남부 검찰청 검사들이 대거 차출됐다. 뉴욕은 세계에서도 범죄가 많고 다양하기로 악명 높은 도시였다. 특히 마약과 금융 등 지능적이고 조직적인 범죄가 들끓었다. 남부 검찰청 검사들은 이미 대규모 국제범죄와 조직범죄 수사를 통해 단련된 베테랑들이었다. 조사관들도 전현직 FBI 요원과 주와 지방 경찰서에서 유능하다고 정평이 난 경관들로 선발됐다. 강력한 드림팀이 출범한 것이다.
특검은 비밀조사를 벌여 윤리위원회에 그 결과를 보고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윤리위와는 별개로 독립 운영된 조직이었다. 특검은 윤리위 명의로 소환장과 수색 영장을 발부하고, 윤리위는 특검의 조사결과와 수집한 증거를 바탕으로 청문회를 개최했다. 그렇기에 박동선이나 김형욱 등 코리아 게이트의 주요 인물들을 공개청문회 전에 비공개 청문과 개별 면담 등을 통해 조사하는 것도 특검 임무 중의 하나였다.
-프레이저위 팀도 20명으로 출범
프레이저 위원회도 본격 가동됐다. 하원 본회의는 3월 9일 HR 319호로 한미관계 조사위원회 구성을 승인하고 예산 35만 달러도 통과시켰다. 180일로 한정된 조사기간에 쓸 예산이었다.
프레이저 위원회는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산하 국제기구소위원회가 공식명칭이다. 그러나 위원장인 도널드 M. 프레이저(Donald M. Fraser) 의원의 이름을 따서 프레이저 위원회로 불렸다.
민주당 소속인 프레이저 위원장은 남부에 비해 진보성향이 강한 미네소타 출신의 변호사로 63년 연방 하원에 처음 진출한 중진 정치인이었다.
민주 5명, 공화 2명 등 7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프레이저 위원회의 한미관계 조사팀은 총 20명으로 구성됐다. 조사관들은 젊은 학자들과 사회과학을 전공한 연구원들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프레이저 의원의 취향에 따라 학계의 진보적인 신진 인사들로 진용을 짠 것이다.
하원 윤리위원회가 법에 초점을 맞췄다면 프레이저 위원회는 학구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상원 윤리위원회(Select Committee on the Ethics)는 일리노이 출신의 아들레이 스티븐슨(민주)이 위원장으로 민주 3명, 공화 3명 등 6명의 상원의원으로 구성됐다.
상원 윤리위 특별검사에는 빅터 크래머(Victor Cramer)가 임명됐다. 그 아래 검사 4명, 법무관 7명 등 12명으로 진용이 갖춰졌다. 100명의 상원의원 전원을 조사대상으로 주로 법률 전문가들로 조사팀이 구성됐다.
상원 윤리위원회와 한국 관계 조사위의 면모들(왼쪽). 하원 윤리위원회와 특검팀의 구성과 면모들.
-윤리위의 설문지
‘제2의 워터게이트’라 불린 코리아 게이트의 커튼을 열어 제치기 위해 의회는 기대와 자괴감에 섞인 전의(戰意)에 불탔다. 코리아 게이트는 불판 위에서 요리사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털 뽑힌 치킨이었다. 그러나 코리아 게이트는 증거도 단서도 없는 이상한 사건이었다. 미 국민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닻을 올렸지만 각 조사위가 확보한 자료는 하나도 없었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가 경쟁적으로 보도한 내용이 유일한 단서였다.
하원 윤리위는 궁리 끝에 하원의원 435명 전원에게 윤리위원장 명의의 설문지를 보내기로 했다. 설문지는 다음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당신은 한국에 간 일이 있느냐?”
“당신은 한국 관련자로부터 100달러 이상의 가치 있는 것을 받거나 주려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느냐?”
이 질문에는 당신 가족이나 직원들을 포함해 모두 보고하라는 내용이 첨부돼 있었다. 의원뿐만 아니라 주위사람들의 연계 가능성까지 철저히 파악하려는 것이었다. 설문은 이어졌다.
“공식행사를 제외하고 주미 한국대사관이나 한국의 기관이 주최하는 파티나 행사에 참석한 적이 있느냐?”
“다음에 열거한 사람들과 접촉한 적이 있느냐?”
“박동선, 김동조, 수지 박 톰슨, 김한조, 김상근.”
주미대사관의 KCIA 요원으로 김한조를 담당했던 김상근이 포함된 것은 그가 망명하면서 이름이 나오자 그 역시 돈을 뿌린 것으로 막연히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435명 중 434명이 답변
설문지를 받은 의원들은 당혹감과 모욕감에 가슴이 쓰렸을 것이다. 명예를 중시하는 의원들이 100불 이상 받은 적이 있느냐는 노골적인 질문을 읽는 순간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는 불문가지다. 물론 자신이 접촉한 적이 있던 인물들과의 연관성을 부인하기 위해 머리도 짜냈겠지만 말이다.
이 전무후무한 설문지를 받은 연방 하원의원 435명 중 1명을 제외한 434명이 답변서를 제출했다. 수사 상황이나 진전에 따라 각자의 정치생명이 걸린 문제이기도 했기에 오해나 의혹을 사기 싫어 충실하게 채워진 답변이었다.
답변서를 내지 않은 유일한 의원은 텍사스 출신의 헨리 곤잘레스였다. 그는 1961년 의회에 진출한 라틴계 하원의원이었다. 훗날 하원 은행재정도시위원장, 금융위원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코리아 게이트를 향한 칼끝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그 와중에 1977년 6월6일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인터뷰 기사가 뉴욕타임스에 대서특필됐다. 박 대통령을 비판하고 박동선 스캔들의 실체를 드러낸 보도내용은 오리무중이던 코리아 게이트의 판도를 단번에 바꿔놓았다.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나도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그 파란의 현대사 속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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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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