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부승 간사이 외국어대 국제정치학 교수
외교관 근무 시절 가장 듣기 싫었던 말 중 하나가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말이었다. 이 “새우등의 세계관”에 따르면,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은 고래이고, 한국은 새우이다. 주변국들이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충돌하면 한국은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린다는 것이다. 이는 주변국들이 한반도의 운명에 대해 합의해주지 않으면 우리로서는 할 일이 별로 없다는 매우 수동적인 현실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은 실제 한국인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다. TV뉴스나 신문은 물론 일상 대화에서도 이러한 인식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미중 갈등에 한국은 샌드위치’ 식의 신문기사 제목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외교 실무에 있어서도 강대국들끼리 만나 한반도 문제를 협의했다고 하면, 일단 적신호다. 당장 외교부에서는 주요국 공관에 우리 모르게 무슨 협의가 오고 갔는지 파악하라는 지시가 나간다. 지난 주 틸러슨 미 국무장관이 마치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 유사시 대응 관련 양자협의라도 갖고 있는 것처럼 시사한 바 있는데, 이런 상황은 사실 한국 정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운명을 강대국들이 논의하고 있다면, 바로 “새우등의 세계관”이 현실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우등의 세계관”은 치명적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선 물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이제 “새우”가 되기에는 너무 덩치가 크다. 한국의 연간 GDP는 약 1조4,000억달러(2016년)이며 인구는 5,100만이다. 이는 경제로는 러시아(1조3,000억), 호주(1조2,000천억), 스페인(1조2,000억), 멕시코(1조)보다 크고, 인구로도 호주(2,400만), 스페인(4,700만)보다 크다. 한국의 경제규모는 작년 기준 세계 11위로서 이미 중견국가들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한다. 유럽 소재 44개 국가 중 한국보다 경제규모가 큰 나라는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뿐이다. 사하라 이남 소재 아프리카 48개 국가의 작년도 GDP를 모두 합치면 약 1조5,000억 달러이다. 한국 경제 하나의 규모가 아프리카 대륙 전체와 거의 맞먹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각국의 한국에 대한 인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제무대에서 외국인 전문가들을 만나면, 다들 ‘한국의 입장과 현실’을 궁금해 한다. “이 문제에 대해 한국은 어떤 생각입니까” 혹은 “이 문제에 한국은 어떻게 대응했습니까”라고 하면서 마치 우리가 과거 선진국들을 바라보던 것과 비슷한 시각으로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머리는 아직 이러한 몸의 변화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는 외부 시각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마치 덩치만 커진 사춘기 소년이 스스로에 대해 어색해 하는 것처럼, 한국이라는 나라 역시 아직 자신의 변화된 위상에 걸맞은 전략과 세계관을 확립하지 못한 것이다.
스스로를 바라보는 주체적 인식이 확고하지 못하니 무슨 일만 생기면 미국, 중국에 물어본다. 그러나 한국이 직면한 중대한 문제에 대해 미국이나 중국이 뾰족한 해법을 제시해 줄리 만무하다. 가령 북핵문제만 해도 트럼프 대통령의 트위터 몇 줄에 많은 한국인들이 일희일비하지만, 사실 현재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정책 라인은 제대로 인선조차 마무리되지 못했다. 확고한 정책이 수립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역시 마찬가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중국의 대북 영향력을 근거로 마치 중국이 단추만 누르면 북핵문제가 금세 해결이라도 될 것처럼 말하지만, 중북관계의 딜레마에서 빠져 나오는 것은 중국의 지도자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한국이 이미 세계적으로 중상위권의 중견 국가이며, 여러 면에서 인류사의 첨단에 서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한국이 직면한 난제들에 대해 한국 스스로 해법을 구상하고, 이를 뒷받침할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의 구상과 해결책을 한국이 주도적으로 주변국에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한국은 지난 수십 년 간 피와 땀으로 이룩한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발판으로 바야흐로 “새우등의 세계관”에서 탈출할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물론, 한국이 여기서 당장 고래가 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그러나 최소한 한국인들 스스로가 자신의 해법을 확고히 하고 한국 스스로의 힘으로 이를 뒷받침하겠다는 각오를 다진다면 최소한 고래들을 선도하는 돌고래의 역할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이제 한국은 스스로의 변화된 위상에 걸맞게 새우가 아닌, 돌고래가 되는 길을 모색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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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승 간사이 외국어대 국제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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