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친구 몇명과 주말에 미술관 구경을 다니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오전에 만나 전시를 하나 보고 브런치를 먹는 만남이다. 뮤지엄 근처에는 대개 맛있는 식당들이 많기 때문에 문화생활과 식도락을 함께 즐기는 셈이다.
게티, 라크마, 마르시아노, 해머, 노턴 사이먼, 하우저 & 워스 등… 그렇게 다닌 지가 벌써 꽤 됐으니 갔던 곳을 또 다시 방문하여 새로 바뀐 기획전을 보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런데 사실 나로서는 이런 전시의 반 이상은 이미 다 관람한 것이다. 전시 개막 전에 열리는 미디어 프리뷰에 종종 다녀오기 때문이다. 때문에 친구들은 본걸 또 본다면서 괜히 미안해하기도 하는데, 사실은 전혀 아니다.
프레스 프리뷰에서는 큐레이터의 설명을 들어서 좋기는 하지만 중요한 작품 위주로만 따라가느라 하나하나 보기 힘들고, 끝나자마자 바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전시를 감상할 충분한 시간 여유가 없다.
그래서 좋은 전시를 취재할 때면 “다음에 꼭 다시 와서 자세히 봐야지”하고 마음먹지만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다른 뮤지엄에서도 새 전시가 계속 열리고 있기 때문에 일단 한번 본 전시를 다시 가게 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런데 친구들과의 뮤지엄 데이트를 통해 같은 전시를 다시 보게 되면서 드디어 그 반복의 즐거움을 실컷 누리고 있다.
어쩌면 처음 관람하는 친구들보다 내가 더 많이 즐길 수 있는 것이, 전체 흐름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작품들에 집중할 수가 있고, 전에 미처 읽어보지 못한 설명을 하나하나 읽어보면서 더 깊은 이해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모두 아는 얘기지만 좋은 예술작품은 여러 번 감상할 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더 많이 알수록 더 많이 즐기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미술품만이 아니라 음악도 그렇고, 책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다. 두 번째 볼 때 다르고, 세 번째 볼 때 다르며, 반복될 때마다 나의 정신과 영혼에 밀착돼 나중에는 거의 체화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런 반복을 자주 즐기는 사람으로서, 또 인생의 후반에 들어선 사람으로서, 여러 작품을 다양하게 섭렵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울림이 있는 몇 가지 작품을 깊이 보고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예로 들어보면 처음 볼 때는 스토리 전개를 쫓아가느라 놓치는 게 많지만 두 번째 볼 때부터 안 보이던게 보이고 안 들리던게 들리면서 제대로 작품을 즐길 수가 있다. 아트하우스 영화들은 이런 반복 감상이 굉장히 중요하고, 특히 영상미가 뛰어난 미장센 영화들은 한 장면 한 장면에 감독이 심어놓은 배경과 구도, 소품, 색채, 음악을 하나씩 발견하게 돼 영화 보는 맛이 난다. 못 알아들었던 부분들을 알게돼 시원해질 때의 그 기분이란.
책도 그렇다. 특히 소설은 이야기를 따라 가다보면 문장의 수려함과 독특한 표현, 섬세한 심리 묘사나 배경 묘사를 대충 지나치기 쉬운데 두 번째 읽을 때부터 작가가 심어놓은 미학적 장치와 곳곳에 깔아놓은 복선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고 전체의 메시지가 읽히는 것이다.
음악은 또 어떤가. 좋아하는 음악을 반복해서 들으면 어느 순간 그 선율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특히 반복의 미학을 뿌리로 삼고 있는 바로크 음악, 바흐나 비발디의 음악을 계속해서 들으면 반복적이고 건축적인 조성에서 느껴지는 유기적인 아름다움에 깊이 빠질 수 있다.
영화 ‘그레이트 뷰티’와 ‘세상의 모든 아침’을 보고 또 보고,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듣고 또 듣고, 테드 창과 김중혁의 소설집을 반복해 읽을 때면 마치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은 왜 같은 이야기를 매일 또 해달라고 하고, 같은 만화영화를 매일 틀어줘도 매번 재미있게 보지 않나.
그래도 나는 매일 그런 건 아니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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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부국장·특집 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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