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곱 살이 되어서야 한글을 뗐다. 그 전에는 밤마다 엄마 아빠한테 읽고 싶은 책을 들고 가서 “이거 읽어주세요” 해야 했지만, 유치원에 다니던 어느 날, 아빠가 바둑판 노트 세로줄에는 ㄱ, ㄴ, ㄷ, ㄹ을, 가로줄에는 ㅏ, ㅑ, ㅓ, ㅕ를 주욱 써주고 그 둘이 만나면 가, 나, 다, 라가 된다는 신기한 원리를 알려주셨다. 그렇게 바둑판 노트 쓰기를 몇 장 하고서 나는 글을 더듬더듬 읽을 수 있게 되었고 곧이어 간판 읽기에 빠져들었다.
‘중앙 유치원’ ‘서울 서점’ ‘이 치과’ ‘제일 수퍼’ ‘코끼리 분식’ ‘수 미용실’ 읽을 수 있는 게 많아지니까 질문도 많아졌다. “엄마. 분식이 뭐에요?” “미용실이랑 이용실은 뭐가 달라요?” 이런 식으로. 세상이 넓어지는 기분이었달까. 갑자기 그때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 이유는 최근에 그 기분을 다시 느꼈기 때문이다.
4년 반 전 처음으로 미국에 와서 살게 되었다. 공항에 내려 캘리포니아의 반짝반짝한 햇빛을 만끽하며 숙소로 이동하는 중 고속도로변 빌보드에서 ‘beautiful and bizarre’라는 광고 문구를 보게 되었다. beautiful은 알겠는데 bizarre는 뭘까? 얼른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 ‘기괴한’이라는 뜻이란다. Winchester mystery house 광고였다.
며칠 후 심심해서 뒤적이던 도서관 그림책에서 ‘Are you my friend or foe?’라는 문장을 읽었다. ‘foe’가 뭘까? 바로 검색 들어간다. ‘적’이란다. “오호, ‘적’은 ‘enemy’만 알았는데 ‘foe’라는 단어도 있구나.”
순간 나는 영어 세상의 일곱 살이 되었다. 삼십 년도 더 전에 느꼈던 기분, 더듬더듬 글자를 읽던 호기심 가득한 꼬마가 깨어나고 있었다. 신나고 설레었다. 찾아야할 보물찾기 쪽지가 아주 많이 숨겨진 숲 앞에 선 것 같았다.
그 옛날 어릴 때처럼 폭풍 습득하는 건 아니지만, 느긋하게 산책하듯 길을 걷다가 보물을 발견할 때마다 하나씩 쪽지를 펼쳐보고 있다. 많이 찾고 싶은 게 아니고, 뭐가 들어있는지가 궁금한 게 아니고, 미지의 종이를 여는 순간의 말랑말랑한 나를 즐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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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하 샌프란시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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