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9월17일 프랑스 북부 캉브레 상공. 순항 중인 영국 전투기 편대를 독일 전투기들이 덮쳤다. 결과는 독일의 완승. 영국 항공군단(공군의 전신)의 ‘F.E.2b’ 전투·정찰기 겸 야간 폭격기는 독일 제국 항공대의 작고 빠른 ‘알바트로스 D.Ⅱ’ 전투기를 당할 수 없었다.
전선 배치 불과 하루 만에 승리를 기록한 독일 ‘추격 전투 항공대대’에는 24세의 신참 조종사 만프레드 폰 리히트호펜도 있었다. 리히트호펜은 1년 뒤 펴낸 자서전에 ‘7대5의 열세를 딛고 이겼다’고 썼으나 영국 측 기록에 따르면 8대20으로 독일기가 더 많았다.
전쟁 중에 20대 중반의 젊은 조종사가 책을 쓴다는 게 의아하지만 그는 가능했다. 국민적 영웅이었으니까. 부상으로 병실에 입원해 당국의 강권으로 출간한 책에 그는 ‘붉은 전투기 조종사(The Red Fighter Pilot)’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아군은 물론 적군에게도 다른 별명으로 불렸다. ‘붉은 남작(The Red Baron).’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군사 교육을 받은 뒤 엘리트 부대의 상징이던 황실 기병대에 배속됐으나 막상 보급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돌격전의 총아로 자부하던 기병이 참호전으로 변한 전쟁에서 역할이 없어진 상황에서 병과를 항공병과로 바꿨다.
후방석 정찰장교로 러시아 전선에 참전한 뒤 전투기 조종사로 변신한 그는 1918년 4월 전사할 때까지 80대 격추라는 최고 기록을 세웠다. 제2차 세계대전보다 격추 수가 적지만 오로지 인간의 감각으로 엔진의 힘과 기관총의 파괴력을 제어한 결과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캉브레 상공의 전투는 ‘1차 세계대전 최고의 격추왕 신화’를 향한 첫 여정이었던 셈이다. 저항 능력을 상실한 적은 더 이상 공격하지 않아 적군 조종사에게도 존경받았다는 그는 정말 인간적이고 신사였을까.
포커 삼엽기를 붉게 도색한 채 하늘을 누볐던 ‘붉은 남작’이 ‘어쩔 수 없이 죽인 적을 애도’하며 슬퍼했는지는 의문이다. 전시물자 부족으로 60잔에서 멈출 때까지 그는 격추할 때마다 은으로 작은 잔을 기념 제작해 자축하며 모았다. 공중전마저 스포츠와 사냥, 기사 대전으로 즐겼던 ‘붉은 남작 리히트호펜’을 독일이 크게 부각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독일은 붉은 남작을 주인공으로 삼는 영화에서도 반전(反戰)과 평화의 메시지를 던지려 애쓴다. 유명하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공중전 에이스를 억지로 만들어 가미카제와 연결해 침략의 역사를 미화하려는 어떤 나라와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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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홍우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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