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무더위같은 인디안 섬머가 며칠 이어지고 바람까지 강하게 불더니 기어이 여기저기 산불이 났다. 거의 매년 이맘 때쯤 건조한 날씨에 바람이 불면서 불이 나지만 올해는 유난스럽게 더 많이 나는 것 같다. 늘 뉴스에서 보던 일이라 또 산불의 계절이 돌아왔구나 하고 지나쳤는데 이번에는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않은 풀러튼 코요테 힐스도 불길에 휩싸였다. 밤새 헬리콥터가 동네를 돌고 소방차 소리로 도로는 온통 뒤덮였다. 뉴스에서도 불타는 우리 동네를 보여 주고 있다.
불길은 저녁 즈음부터 시작되어 주택가 가까운 산등성이를 태우고 있었다. 이 길은 내가 산책할 때 자주 지나는 곳인데 온통 마른 나무들과 선인장들이 모여 있는 언덕이다. 뉴스에서는 경찰들이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막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번쩍이는 경찰차의 불빛과 늘어서 있는 여러 대의 소방차도 보여준다. 주택가 지붕 위를 지나 코요테 힐스로 날으는 헬리콥터는 하늘에서 연신 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직 우리 집 있는 곳까지는 대피지역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이 불이 곧 꺼질 수 있는 상황인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 없어 늦게라도 대피할 수 있도록 일단 짐을 좀 챙기기로 했다. 지난번 지진 때 간단하게 싸 놓았던 가방에 다른 것을 조금씩 더해 넣었다. 지진 났을 때 들고 나갈 가방에 챙겨 놓은 것은 여권과 소셜카드와 약간의 현금과 지진 대비용품등 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이것저것 자꾸 더하게 된다. 이 상황에서도 사람의 욕심이 스물스물 올라온다. 만약에 이번 불로 집이 다 타버리게 된다면 지금 조금이라도 더 챙기지않은 것을 후회하게 될까하고 몇가지를 더 넣었다. 지난번 보다 커다랗게 싸여진 가방을 챙겨 놓고, 옷도 입기 쉽게 꺼내 놓고, 머리맡에는 정전을 대비하여 손전등도 준비해 놓았다. 다행히 그날 밤이 무사히 지나고 불은 주택가까지 내려오지 않고 꺼졌다. 대피했던 사람들도 각자 집으로 돌아 왔다. 마당에 나와보니 매체한 공기에 재들이 날리고 있었다.
아침 산책길에 그곳에 가 보았다. 산책로 철조망 너머로 타다남은 나무들과 선인장들이 보였다. 검게 변한 언덕은 맨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뉴스에서 치솟는 불길을 볼 때에는 금방이라도 집까지 덮칠 것 같았는데 가까이 가서보니 다행히도 산 언덕 일부만 태우고 많은 부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검게 타버린 그 자리도 내년 봄이 오면 새로운 싹이 다시 돋아날 것이다. 오늘은 하늘도 말갛게 개이고 푸르다.
집으로 돌아와 대피하려고 꾸려 놓았던 가방을 풀었다. 다시 그것들을 제자리에 돌려 놓으며 있어야 할 것이 제자리에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묵묵히 제 할 일을 다 하는 것이 사람이건 물건이건 참으로 위대한 사명을 완수하는 일이다. 무엇인가를 상실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그 존재의 소중함을 인식하는 것이다.
때로는 소용돌이 치는 변화를 열망할 때도 있었으나 어쩌면 하루하루 지루하게 반복되는 시간들이 감사의 시간이다. 욕심에 관한 성찰도 다시 하게 된다. 평온한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놓치지 말아야 겠다.
<
박연실 수필가·풀러튼>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