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건강하게 오래 잘 살려면 첫째로 부모를 잘 골라야 합니다.”
의학 세미나에서 유명한 의사가 강의 첫 마디를 이렇게 시작해 청중을 와르르 웃겼다.
하긴 내 배에서 나온 자식도 마음대로 못 고르는데, 부모와 자식을 마음 대로 못 고르는 게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이라고들 한다.
“부모를 잘 만나야 좋은 남편을 만날 수 있고, 좋은 남편을 만나야 좋은 자식도 가질 수 있다.” 조선시대와 일제 강점기로 일생을 사신 할머니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혼자 탄식처럼 하시던 말씀이었다. 그 시대 사람들의 운명론에 난 어려서부터 동의하지 않았다.
전쟁으로 부서져 버린 어린 시절을 지내며 나를 지탱한 건 “난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다, 누군가의 잘못으로 여기 잠깐 있을 뿐, 이제 곧 여길 벗어날 거다”라는 내가 나에게 건 최면이었다. ‘소공자’와 ‘소공녀’처럼 난 여기서 구출된다는 건방진 생각은 어디서 왔을까? 그건 아버지의 기억 때문이었다.
떠나 버리신 아버지는 해방 후 소위 인텔리겐차셨다. 항상 책을 읽고 바이올린 연주를 하셨고 영어를 배워야 한다며 늘 공부하셨다.
미국에 와 30년 넘게 소아과 의사로 여러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걸 지켜 보며 어떤 부모에게 태어난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는 지에 항상 관심을 두었다.
아주 힘든 상황의 아이들에게 그의 곁에 있던 실오라기 같은 힘과 영향력이 그들을 끌어 올릴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할머니, 아주머니, 선생님, 누구든지 그 애의 손가락을 잡아 준 것이 그들이 생각할 수 없는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는 결론이다.
할머니가 병약한 나를 데리고 일본인 의사에게 가면 내가 하도 시끄럽게 울어 다른 엄마들이 눈살을 찌푸려 멀리 앉아 있었고, 의사가 자기가 해줄 수 있는 치료가 더 없다고 더는 데려오지 말라 했을 때, 할머니는 대답하셨다.
“당신은 의사이고 오는 환자를 치료 할 의무가 있으니 내일 다시 오겠다.”고. 그런 특별한 할머니가 계시지 않았더라면 난 어찌 되었을까? 할머니는 내게 그 가는 실이었다.
할머니 손을 잡고 오는 아이와 그들의 할머니에겐 꼭 내 할머니 얘길 해 주곤 했다. 입양을 하고자 하는 부모들이 사진과 의료기록 등을 가져와 봐 달라면서 흔히 “왜 한국 사람들은 이런 아이들을 입양하지 않느냐” 고 묻는다. 피는 물 보다 진하다는 몇 천년 내려 오는 관습이라는 내 곤궁한 설명에 그들은 갸우뚱 했다. 난 그 아이들이 어느 집에 들어가 어떻게 자라는 지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했다.
어느 아이는 아주 부잣집으로 왔고 어떤 아이는 좀 떨어진 시골 집으로 왔다.
운명이 어떤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점지해 주는 게 아니고 생리적으로 받고 태어난 DNA 라고 믿는다. 아울러 애들이 자라며 보고 듣는 행동이 그 다음의 한 켜가 되어 사람을 겉으로 둘러싼다. 그러니, 입양된 아이들은 부모를 두 번이나 고르게 된 사람들이다.
<
김경희 소아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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