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9년 빵을 요구하는 성난 파리 시민들은 시 중심가에 있는 정치범 수용소를 습격했다. 공포의 대상이었던 그곳을 점령한 시위대는 수비대 전원을 무자비하게 학살 한 후 찾아낸 것은 3명의 정신병 환자와 4명의 일반 죄수뿐이었다. 밤은 부족하나 평화롭던 거리를 피로 얼룩지게 한 프랑스 대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마라’ 는 신문사 소유자로써 뛰어난 문필과 웅변으로 대 혁명을 이끈 혁명 지도자 중의 한사람이었다. 이 혁명 지도자는 또한 과학 분야에서도 지도자가 되기를 열망했다. 정치적 수완에 비해 그의 과학 논문은 미숙한 것이어서 당대의 유명 과학자 중 한 사람인 ‘라브와지애’ 에 의해 별 가치가 없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의 분노는 비판자의 비리와 함께 프랑스 적들과의 내통을 들춰내어 자신의 신문을 이용해 고발함으로써 복수의 길을 찾았다.
한편 혁명 재판소의 판결로 부패 관리, 혁명 배신자 등의 죄목으로 사형수가 된 라브와지애를 구하기 위해 변호인은 과학자로써 그의 공헌을 호소했다.
“혁명에는 과학자는 필요 없다. 필요한 것은 오직 정의뿐이다.”는 대답뿐이었다. ‘ 힘이 곧 정의다.’ 란 구호가 지배하는 혁명 시기에 마라는 이 한마디 말로 과학자를 사형대에 서게 함으로써 마라의 복수는 성공했다.
화학도들이 만나게 되는 라브와지애는 현대화학의 모든 기초를 깔아놓은 화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과학자이다. 같은 시기에 세금 징수원, 병기고 지배인 등의 직책으로 과학자로서의 그의 길은 평탄했다. 그러나 시대를 잘못 만난 이 과학자는 앞에서 서술한 대로 복수의 희생자가 되어 사형대에서 생을 마쳤다.
데비드는 화가로 같은 시기에 혁명 예술과 국민축제(최초의 국민 행사) 등을 주도했다. 황제 나폴레옹을 찬양하고 혁명가를 옹호했던 그는 뛰어난 미술가로 황제의 총아였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 황제 대관식 ’, ‘ 마라의 죽음 ’ 등은 그 시대의 정치적 배경을 담은 그의 작품들이다.
그의 작품 ‘마라의 죽음’ 에서는 욕탕 안 반나의 몸이 흰천으로 덮혀 있고 욕탕모를 쓴 채 비스듬히 누워있는 그를 보게 된다. 한 여인의 칼에 의해 찔린 가슴 위에 피가 흐르는 상처, 어깨까지 늘어진 머리, 슬픔의 미소를 지은 입술, 쓰던 깃털 펜을 잡은 채 늘어진 팔, 옆 바닥에는 사용됐던 칼이 보인다.
혁명기의 뛰어난 선동가는 그의 인생 마지막 시간을 이렇게 마감했음을 알려준다. 나폴레옹 몰락 후의 왕정 복고는 그를 망명자로 만들고 망명지 브르셀에서 살아서는 그리운 조국에 돌아올 수 없었다.
살아있는 정치인들은 ‘정치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예술이다’ 라고 말하지만 ‘정치는 유에서 무로 되돌리는 패가망신의 요술이다’ 라고 죽은 혁명가는 죽어서 말한다. 좌익 정치인들의 선동으로 거리에 나선 폭도들의 파괴 행위는 보통인들의 현명한 정치 철학을 요구한다.
“모든 이론은 희색이다. 푸르른 것은 오직 숲 속의 나뭇잎 뿐이다. ” 파우스트의 말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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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옥/전 고등학교 역사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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