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봄, Dogwood 나무 아래 웬 검부러기가 소복하다. 손으로 걷어내려는 순간 뭔가 뭉클한 감촉에 화들짝 놓아버렸다. 나무 밑이 파헤쳐진 걸 보니 토끼가 굴을 파고 이미 새끼까지 낳은 모양이었다. 별수 없이 ‘나와 토끼가족과의 동거’ 아니 ‘신경전’이 시작된 연유다.
토끼들이 오줌과 콩자반 같은 똥을 싸놓아 잔디가 군데군데 노랗게 죽어갔으니까. 상추나 화초 싹을 싹둑 먹어치우니까. 심지어 금년엔 크로커스한테 봄맞이 꽃 인사도 못 받았다. 겨울잔디가 빈약하던 차에 웬 떡이냐는 듯, 토끼가 크로커스 싹까지 아작아작 잘라먹었으니까.
또 청 매실이 빨개지니까 먼저 시식한다며 다 갉아대고 버리니까. 그런 식의 밉살스러운 짓만 골라 해서, 토끼만 보면 발을 굴러 쫓아버리거나 막대기로 위협했다. 나 자신은 유난히 스트레스 받는데 예민하면서, 토끼에겐 내가 스트레스 자체이자 폭군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대를 물려 또 도그우드 나무 밑을 파기에 돌로 메웠더니, 눈치 없게 옆에다 또 팠다. 가뜩이나 기신(氣神)없는 도그우드와 옆의 장미가 죽을까봐 큰 돌들을 쌓아 가차 없이 집짓기를 중단시켰다. 그제야 옆집 잔디밭에다 굴을 파고 이사를 하기에 쾌재하며 미련 없이 토끼와 안녕을 고했다.
그러던 차 매일 산책코스인 반 블럭 떨어진 놀이터 공원에서였다. 우리 토끼랑 같은 종자인 흰 솜 꼬리토끼가 낭자하게 피를 흘린 채 죽어있다. 배만 싹 갈라져 참혹하게 내장을 드러낸 모습으로 보아 저보다 힘센 적에게 속수무책 당했다. 이틀 후에야 공원토끼를 누군가가 고맙게도 공원 쓰레기통에다 치워줬다.
며칠 후인가. 집 뒷마당에 토끼 똥도, 고양이똥도 아닌 개똥같은 게 있다. 밤에 들개가 돌아다닐 리 없어 너구리(Raccoon dog)의 흔적으로 여겨졌다. 그랬는데 오늘 아침 난데없이 우리 드라이브웨이에 토끼가 죽어있다. 공원토끼랑 똑같은 수법으로 살해된 판박이로 보아 동일한 범인의 짓이다.
너무 무참해 소름이 돋았지만 차를 빼려니 사태를 수습해야했다. 우선 심약한 내가 강해지자면서 심호흡을 한 다음, 장갑을 두 개씩 끼고 몇 겹의 플라스틱 백을 챙겼다. 고개를 돌린 채 백에 넣다가 그만 정지된 토끼 눈과 딱 마주쳤다. 그 검고 순한 눈이 꼭 살아있는 듯해 깜짝 놀랐다.
문제는, 파리들은 벌써 꼬이는데 쓰레기차는 이미 새벽에 다녀가 나흘 후에나 올 거라는 것! 또 땅에 묻자니 너구리가 냄새 맡고 파헤칠 게 기정사실인 것! 정말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고민 고민 끝에 꽁꽁 더 싸서는 비열하게 공원쓰레기통에 넣었다. 공원은 쓰레기를 자주 쳐가고 공원토끼참사(慘死)때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불쌍하게 살해된 토끼를 묻어주지도 못하고 쓰레기통에 유기한다는 죄책감으로 가슴이 다 두근거린다. 정말 이건 못할 노릇이었다.
다음날 보니 예상대로 공원쓰레기통은 싹 비워졌고, 내가 간절히 명복을 빌던 토끼는 그렇게 사라졌다. 그럼에도 자꾸만 감겨주지도 못한 그 까만 영롱한 눈이 떠오를 적마다 내겐 고통이다. 아마도 싸우면서 정이 들었나보다.
문득 내가 하도 미워해서 비명횡사했나 싶어 더 짠하고 미안하다. 사람이건 생물이건, 설혹 마음에 안 든다 해도 절대로 미워해선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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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인숙/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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