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어서다. 성난 얼굴의 손님이 다가와서 할 말이 있단다. 중년의 흑인 여성, 옆에는 이제 학교에 막 들어간 듯 싶은 남자애. 아이의 손에는 빨아먹는 과자가 쥐어져 있다. 여인이 아들인지 손자인지 가늠이 애매한 아이를 다그쳤다. Tell him!
소매 서비스업종에서 다들 그렇듯이 손님들 불평 받는 일이 너무 싫다. 십수 년 넘게 별별 꼴 다 당해봤어도 늘 감당이 안 된다.
머릿속을 스치는 그림…. 애 손에 든 과자를 두고 돈내라, 다른 데서 산 거다, 기다 아이다 날선 시비가 히스패닉 캐시어와 흑인 손님 사이에 벌어지는 모습. 안 봐도 비디오다.
이민자들 사이에서 영어 짧은 어른이 애들을 영어 통역으로 내세우는 건 흔한 풍경이다. 대충 듣고 달래서 보내야지 마음 정하고 꼬마를 향해 허리를 기울였다. Okay, tell me what happened.
겁 먹은 왕방울 눈의 꼬마가 쭈빗대다가 엄마 혹 할머니의 윽박지름을 한번 더 듣고 입을 여는데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스페니쉬!
어, 어, 나 못 알아듣는데 그 소리를 할 겨를도 없었다. 당황해서 손님을 쳐다보니 이 아줌마는 그제사 편한 얼굴이 되어 내게 의미 있는 눈짓을 보내온다. 이건 뭐지? 아, 아, 알겠다. 감이 왔다. 물건을 제 맘대로 집어나온 제 아이를 혼내달라는 것.
엄마 혹, 귀찮다. 그냥 엄마라고 하자. 엄마가 한 마디 더 하자 꼬마가 과자를 내게 내밀었다. 뭐라 뭐라... 노! 잉글레스!!!... 쏘리... 애 엄마가 내게 또 윙크를 보내온다. 터질 것 같은 웃음을 꾹 참고 엄한 얼굴로 두 눈을 맞추었다.
아오리따 뽀기또, 마스 따르데 그란데, 꼼프렌데?
지금은 작지만 나중에 커진다 알겠니,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 대충 그런 뜻으로 마구잡이 에스빠뇰을 시전했는데 옆에서 얼씨구 잘한다는 무언의 추임새로 자신감이 만땅 오른다.
노 에스꾸엘라, 노 푸투라, 엔티엔데?
학교도 못 가고 미래도 없다 알겠니? 여섯살짜리가 미래가 뭔지 알겠느냐만 내 아는 스페니쉬 다 동원해서 장광설을 마치고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내내 울상이었던 꼬마도 안도의 빛으로 손에 힘을 쥐어 같이 흔든다. 노 마스. 다시는 그러지 말아라.
둘을 보내고 생각한다. 검다고 흑인이고 흑인이라면, 영어 시끄러운 미국 흑인 아니면 영어 짧은 아프리카 이민자 둘 중 하나겠지? 아니다. 스페니쉬 쓰는 캐리비안 흑인이 있다. 어디에서 왔든 어떤 피부색이든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애들 데리고 장보러 와서 태연자약하게 바나나, 요구르트 까먹이고 선반 빈 구석에 껍질 쑤셔넣는 엄마도 있지만, 가난해도 애 손버릇 잘못될까 걱정하는 부모가 있다는 것, 나처럼 우리처럼.
선입견 그리고 편견은 편한 것, 그 함정에 오늘도 빠졌다는 것이 부끄럽다. 당황해서 꼬마 이름도 묻지 않았잖아. 꼬모 떼 야마, 스페니쉬의 기초인데. 이름을 기억해야 다음 번에 보면 사탕 하나라도 건네며 인사 나누지.
<전 언론인,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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