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덤덤하지만 처음 소설과 시로 등단 할 때는 가슴이 설레이고 감격스러워 무언가 사고를 치고 말겠다는 마음이었다.
바로 그때, 100살 먹은 한 목사의 소식이 왔다. LA의 한 선교 대회에 그가 한국에서 온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인 최초 선교사인 방지일 목사다. 그는 영등포 교회의 담임이었다.
요새는 100살 먹은 자가 가끔 있지만 그때는 드물었다. 그에게 헌시 패를 증정 한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뿌듯했다, 그런데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내 임지가 노스캐롤라이나인데 한글로 패 만드는 곳이 없다.
천상 뉴욕에 가야만 한다. 뉴욕에서도 패가 제작 하는 동안 며칠 자야 한다. 패를 만들어 그것을 들고 비행기를 타고 LA에 도착했다.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분을 위하여, 그러나 수천 명 앞에서 그를 칭송해 드린 것으로, 그의 나이만큼이나 기나긴 인생 여로에 적으나마 기쁨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생겼다. 거기에 내가 왔다고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뉴욕에서 활동하다가 LA로 간 박요한 목사다. 형제처럼 지낸 자이다.
서라벌 예대를 나온 그가 나에겐 문학의 길로 안내한, 특별한 의미를 준 자다. 한 번은 그와 L .I 몬탁에 가서 호텔에 기거 하며 문학에 대해 정론을 펼치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격려 덕분에 소설을 10여편 쓰고 시도 수백 편 썼으며 문학 마을 문단에 등단하여 해외기독문학의 문학회 회장까지 했으니 말이다.
몸이 아픈데 거기까지 온 것은 기억에 남을 일이었다. 그 후 그가 곧 하늘나라에 갔으니, 긴 나의 여로에 하나의 방점을 찍어준 일이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LA까지 가서 그런 일을 한 것은 미친 사람 아니면 있을 수가 없다. 의미 부여를 위해 때로 지루하기 쉬운 인생 여정에 가끔 그런 미칠 때가 있었으면 좋겠다.
100세가 된 방지일 목사의 환한, 웃는 얼굴 모습이 생각난다.
어느 미친놈의 모습을 회상하며 그가 죽어 잠자며, 세상 여정 100년 동안 살면서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김길홍 목사의 꿈도 꾸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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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홍/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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