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7년 전 쯤인가. 늦겨울 산책 중 잔디밭 틈에 뻥튀기에서 금방 나온 쌀 튀밥 같은 흰꽃 하나가 수줍게 쏘옥 올라온 걸 보게 됐다. 꽃만 없다면 그냥 잔디려니 했겠다. 꽃이 앙증맞아 ‘참 특이하네! 뭐지?’했는데, 얼마 후 공터에서 다시 조우했다.
혹시 야생난인가 하고 집의 부엌창가 쪽 화단에다 이식했다. 그리곤 잊었는데, 다음 해 겨울, 외로웠던지 흰쌀 꽃봉오리들을 오종종 달은 친구들까지 대동, 재등장했다. 새하얗게 쌓인 눈을 뚫고서 말이다. 춥다고 다 피신한 빈 화단에서 당당하게 ‘독야청청’하니 한껏 잘난 체 할만하다. 그런데도 고개를 푹 숙인 자태가 새삼 겸덕(謙德)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고고하고 청아한 모습에 끌려 이름을 알고자 <재미있는 꽃 이야기>란 책을 뒤졌다. 알면 보인다더니, 그 꽃 사진이 떡 나와 있는데도 어찌나 반갑던지...비로소 알게 된 이름은 그리스어로 우유(Gala)에 꽃(Anthos)을 합친 갈란투스(Galanthus)로 20여종이 있단다.
별명이 본명보다 더 예쁘고 기억하기도 좋은 스노드롭(Snow Drop)이고, 수선화과의 구근초로 알뿌리 식물 중 개화가 입춘 전 1월로 일등이다. 원산지는 동, 서유럽이고 꽃말도 마음에 든다. 희망, 위안, 반가운 소식이니까.
꽃의 사연은,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쫓겨났을 때 눈이 내렸단다. 이브가 추위에 떨며 절망하자, 천사가 내려와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따뜻해지니 상심하지 말라”고 위로하며 눈송이를 휘젓자, 눈송이들이 스노드롭으로 변했다나. 그 후 겨울이면 이 꽃이 눈의 보호아래 피어나게 된 거라니, 자못 신화적이다.
우리 화단의 스노드롭도 해마다 동료들을 늘려줘, 겨울엔 나만이 즐기는 ‘비밀의 정원’이 됐다. 겨울이 오면 파란 잎들이 10cm정도 솟아나고 이어 하얀 쌀 같은 꽃봉오리가 달린다. 그게 서서히 벌어지면서 하얀 종처럼 매달려 있다가 3장의 꽃잎을 소곳이 펼친다. 그제야 꽃잎 안의 꽃대가 살짝 고개를 내미는데 이 꽃자루가 매력의 포인트다.
꽃대 밑이 흰색과 연두색이 이어진 스카프를 두른 듯 하고, 위 끝은 연두 빛 하트가 점점이 수놓인 레이스처럼 멋을 냈으니까. 개화과정과 개화기가 길어 겨우내 버티다가, 수선화 싹이 올라와야 하얀 꽃잎이 지기 시작한다.
그리곤 꽃받침이 연두 팥알처럼 여물어 꼭 열매처럼 달린다. 그리곤 점차 잎도 스러지며 다음 타자에게 바통을 넘기듯 자리를 양도한다. 곁에서 지켜 본 스노드롭의 일생이다. 누구라도 그 겸손하고 깨끗한 성정(性情)에 반하겠다.
올 겨울, 화씨 10도 아래라 만물이 꽁꽁 결빙상태였던 때다. 아무리 1월 1일의 탄생화이자, 명색이 월동 꽃이라 해도 어찌 이 강추위를 견디겠나. 아무래도 온 몸에 얼음 멍이 들었거나 서리를 맞았듯 맥을 놓았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다음날 보니 잎도 파릇파릇, 꽃도 쌩쌩, 의연하다.
설강화란 애칭도 있다는 걸 씩씩하게 증명한 셈이다. 겨울이면 그렇게 나랑 눈 맞추며 오붓하고 은밀하게 정을 쌓던 차, 이 꽃이 확 뜨게 됐다. 202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미국시인 루이스 글릭(Leuice Cluck)의 대표시가 바로 ‘Snow Drops’이었던 것. 류시화씨가 ‘눈풀꽃’으로 번역한 그 시가 사랑을 받으며, 영상에 단골로 등장, 인기 있고 유명한 꽃이 됐으니까.
체코 문호 카렐 차페크(Karel Capek)도 “아무리 지혜로운 나무나 명예로운 월계수라해도 찬바람에 하늘대는 창백한 줄기에서 피는 설강화의 아름다움엔 견줄 수 없다”고 예찬했는데 절대 동감이다.
이제는 많은 이들이 삭막한 한 겨울에도 상록수만이 아닌, 온실 꽃이 아닌, 자연의 꽃과 교류하며 희망과 위안을 얻을 것이다. 신비하고 강인하고 겸비(謙卑)한 스노드롭 덕이다. 나 역시 그 작은 꽃을 볼 때마다 가상하고 고마워 미소가 피어나곤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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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인숙/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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