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꿈을 안고 미국 올 때 들고 온 책은 전공서적이 아니라 무거워 죽겠는 요리책 전집이었다. 아직 미혼이던 나에게 직장 선배가 골라준 책. 요즘은 한국-미국이 앞뒷집 드나들 듯 별거 아닌 세상이지만 그때만 해도 바다 건너 머나먼 타국 땅으로 떠나는 나에게 선배는 두꺼운 요리책 한 박스를 전하며 신파조로 말했다. “한국을 잊지 마!” 20권짜리 양장본 전집에는 갈비찜부터 나박김치에 수정과, 약식에 이르기까지 온갖 한국요리들이 화려한 컬러사진으로 들어있고 재료 및 만드는 법이 차근차근 설명되어 있었다. 그 나이까지 평생 내가 한 일이라고는 공부, 학교, 취업, 회사, 출장, 그리고 틈틈이 운동, 연애…. 손수 음식 만들어볼 기회 없이 살다가 어느 날 홀로 미국 땅에 내렸다.
요리책에 나온 재료를 사러 코리아타운 한국마켓에 나가보면 이름도 처음 듣는 채소와 양념류와 부위별 고기와 생선들이 날 잡아 잡수 하면서 눈길을 끈다. 요리전집 1권부터 20권까지, 모든 메뉴를 빼먹지 않고 한번 씩 연습하는데 꼬박 1년이 걸렸다. 한번 해본 요리는 머리에 기억되는 게 아니라 눈과 코와 혀와 손바닥에 조물조물 저장되어 재현 가능 모드로 남았다. 초보자가 겨우 흉내내본 수준으로는 그 정도도 감지덕지인데 알고 보니 한식이란 쌀이나 밀가루를 이용하는 주식이 4백가지, 고기나 채소, 해산물로 만드는 부식은 1,500가지 이상이라고 한다. 정말 메뉴는 많고 인생은 짧다.
인터넷의 1인 먹방은 세계적 주목거리다. 밥상에 둘러앉아 밥 같이 먹는 게 ‘식구’라면 그건 가상현실 속 이야기. 핵가족도 지나 2인 가족이라도 마주앉아 밥 먹을 시간이 없다. 스마트폰이 신체의 일부가 된 세상, 혼자 먹방을 켜놓고 진행자와 같이 밥을 먹는다. 입으로만 먹지 않고 눈으로도 먹고 냠냠 찹찹 귀로도 먹는다. 진행자들의 튀는 표현도 입맛 자극이다. ‘케찹은 지우개를 찍어 먹어도 맛있고, 튀김은 신발을 튀겨도 맛있지.’ 해외 언론에서는 한국의 먹방 인기를 ‘음식포르노’(Food Porn)라고 이름 붙인바 있다. 아울러 남성 진행자들의 쿡방도 인기 폭발이다.
얼마 전 미국 인지심리학 저널에는 ‘먹기보다는 만들기가 개인의 자신감과 자존감, 그리고 집중력을 높인다.’는 연구결과가 소개됐다. 흙 묻은 감자, 물에 씻은 채소, 싱싱한 생선을 만지면서 스트레스가 풀리고 우울증상이 감소되었다는 게 여러 연구들의 공통된 결과다. 쿠킹이 치료다. 임상심리에서 특히 우울증치료에 자주 사용되는 행동활성화 기법(Behavioral Activation Program)이 그것인데, 주어진 삶에 적응할 수 있도록 환자가 좋아하는 활동의 횟수는 늘이고, 반대로 별 소득이 없는 활동은 감소시킨다. 이 기법은 대단위 연구결과 효과성이 검증되었고 메타분석연구에서도 대단히 긍정적인 결과가 나타나면서 미국심리학회에서는 이미 우울증에 대한 단독치료, 근거기반치료(Evidence-Based Treatment)로 채택이 되어있다. 조리법을 따르느라 정신을 집중하는 동안 스트레스가 풀리고 완성된 작품(요리)을 보며 자신감을 키울 뿐 아니라 부정적 사고를 억제하는데 도움이 된 사례가 연구마다 가득하다.
오늘 아침, 블루 무드인가? 그렇다면 키친으로 가자. 냉장고 구석에 숨어있던 재료를 꺼내 일렬횡대 늘어놓는다. 요리 못한다고? 맛없으면 어떤가. 먹자는 게 아니고 만들자는 건데. 그게 재미이고 그게 힐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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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케이 임상심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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