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지어준 내 이름 석 자가 Mijung An으로 불리기 시작한 지도 벌써 12년 차이다. 커피숍에선 에이미(Ami), 식당 예약 시스템에서는 MJ, SNS 닉네임은 실비아를 쓴다는 것을 포함하면 나는 현재 네 개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내가 이름을 네 개씩이나 갖게 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미국 생활 초반에 즐겨 찾던 커피숍에서 주문자의 이름을 불러주기 시작했는데 내 이름을 알아듣거나 제대로 읽어주는 바리스타가 극히 드물었다. 게다가 줄지어 선 주문 대기자들을 뒤로하고 내 이름을 뜻하는 알파벳 여섯 글자를 일일이 불러주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가 주문한 커피만 잘 나오면 된다는 마음으로 성의 A와 이름의 Mi를 따서 에이미 Ami를 지었다. 식당 예약을 할 때도 Ami를 쓰면 되었는데 내가 처음 살았던 미국 동네에 유난히 에이미가 많았다. 분초를 다투는 테이블 차지 경쟁에서 중복은 있을 수 없는 일! 우습지만 배고픔에 못 이겨 식당 예약만을 위한 MJ라는 이름을 따로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실비아라는 이름은 엄마가 나에게 지어준 이름이다. 내가 지은 이름은 아니지만 참 정겨운 이름이 되었다.
사실 그 밖에도 나는 몇 개의 이름을 더 가지고 있다. 후자의 이름들이 전자의 이름들과의 다른 점은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타인에 의해 명명되었다는 것이다. 한인 사회에서의 OO부인, OO 엄마가 그렇다. 아이 이름이 겹치는 경우 나는 OO 엄마 2가 되기도 한다. 나는 이 이름들에 쉽게 정을 주지 못한다. 내가 지은 이름이 아닐 뿐만 아니라 역할만을 강조하는 호칭에 가깝기 때문이다. 게다가 잘 따져보면 실용적이지도 않다. 한 예로 OO부인의 이름 체계를 따르려면 우선 남편의 이름과 호칭을 정확하게 부른 뒤에 부인을 붙여야 하는데 이는 내 이름 세 글자보다 훨씬 길다. 물론 사회적으로 이런 호칭 시스템을 갖추게 된 것은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이름들은 역할만으론 드러나지 않는 나의 정체성을 흐리게 한다. 그리고 흐려진 정체성만큼이나 옅어진 나의 존재감도 하염없이 작아진다.
여러 개의 이름 중 내가 불리고픈 이름은 안미정이다. 너무 평범해서 간혹 민정으로 잘못 읽히기도 하는 내 이름. 나만 아는 갖은 방법으로 가꿔온 내 이름을 나는 정말로 사랑한다. 해외 이주 생활을 통해 내 이름을 지키기 위해선 여러 경계들을 넘나들 수 있는 친절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의지가 있는 타인에게 내 이름의 정확한 발음을 가르쳐주고, 또 공들여 알파벳을 하나하나 불러주는 여유 말이다. 서로의 이름을 묻는 친절함이 일상이 되는 어느 날을 꿈꿔보며 나는 오늘도 묻는다. 당신을 어떤 이름으로 불리길 원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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