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럼프 행정부 새 지침, 전 세계 영사관에 하달
▶ ‘건강조건’ 강화해 논란, “위험한 발상” 우려 커져

서울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 미국 비자를 발급받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연합]
트럼프 행정부가 비만이나 당뇨병 등 만성질환을 이유로 이민자의 비자를 제한할 수 있는 새 지침을 도입해 논란이 일고 있다.
국무부가 최근 전 세계 미국 대사관과 영사관에 하달한 이 지침은 신청자의 건강 상태를 비자 발급 여부의 핵심 요소로 평가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조치가 실질적으로 취약계층과 장애인을 겨냥한 차별적 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지난 6일 비영리 보건전문 매체인 KFF 헬스뉴스에 따르면, 국무부는 영사관 직원들에게 신청자의 연령, 질병 이력, 재정 상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미국 입국 시 ‘공적부조(Public Charge)’, 즉, 정부 재정에 부담을 줄 가능성이 있는지를 판단하라고 지시했다.
특히 새 지침은 “심혈관 질환, 호흡기 질환, 암, 당뇨병, 대사성 질환, 신경계 질환, 정신건강 문제 등 장기적이고 고비용의 치료가 필요한 질병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여기에 비만과 고혈압까지 포함돼 있어 사실상 의료 사유로 입국을 제한할 수 있는 폭이 크게 넓어졌다.
이전까지 이민비자 신청자는 미국 대사관이 지정한 의사의 건강검진을 통해 결핵 등 전염병 여부, 예방접종 이력, 약물·알코올 사용 여부, 정신건강 기록 등을 제출해야 했다. 그러나 이번 지침은 비전염성 만성질환까지 포함하면서 비자 심사권한을 비의료 전문가인 영사관 직원에게 부여했다는 점에서 논란이 예상된다.
가톨릭 이민법지원네트워크(CLINC)의 찰스 휠러 선임 자문관은 “영사관 직원들은 의료 전문지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판단에 따라 미래의 의료비용이나 긴급상황 발생 가능성을 추정하도록 요구받고 있다”며 “이는 극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번 조치가 “사실상 영주 이민자나 가족 동반 이민 신청자에게 집중적으로 적용될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실제 국무부 공문에는 “신청자가 평생 치료비를 공공보조나 정부 재정 지원 없이 감당할 수 있는 충분한 자산이 있는가”를 묻는 문구가 포함돼 있다. 이에 따라 비자 심사관은 신청자의 건강 상태뿐 아니라 취업 가능성, 재정 자산, 그리고 부양가족의 건강 상태까지 검토해야 한다. 가족 중 만성질환자나 장애인이 있을 경우, 신청자의 근로 지속 능력까지 문제 삼을 수 있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지침이 트럼프 행정부가 2019년에 추진했다가 법원에서 제동이 걸린 ‘공적부조 규정’의 부활이라고 지적한다. 당시 규정은 복지 수혜 가능성이 있는 저소득층 이민자에게 영주권이나 비자 발급을 제한하는 내용으로, 인권단체와 이민 변호사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조지타운대 이민전문 변호사 소피아 제노베세는 “비자 심사관이 신청자의 만성질환 이력이나 예상 의료비용을 근거로 비자 발급을 거부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며 “이는 국무부의 ‘가정적 가능성)’을 이유로 비자를 거부할 수 없다는 기존 규정과도 충돌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당뇨병 이력이나 심혈관 질환을 가진 이들이 대규모로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편, 백악관은 이번 지침이 트럼프 전 대통령의 행정명령 ‘세금으로 불법 이민을 지원하지 않겠다’에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공문에는 “세금 납부자의 재정이 부적격 외국인에게 사용되지 않도록 보장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명시돼 있다.
현재 전 세계 인구의 약 10%가 당뇨병을 앓고 있으며, 심혈관 질환은 주요 사망 원인으로 꼽힌다. 전문가들은 이번 조치가 질병 유무를 이유로 이민자의 인권과 평등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며, “건강 상태를 근거로 이민자를 선별하는 것은 사실상 새로운 형태의 차별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국무부는 이번 지침에 대한 언론의 논평 요청에 즉각적인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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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세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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