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쓴 작가중 가장 위대한 인물을 하나 꼽으라면 거의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지목할 것이다. 그가 작품에서 사용한 단어 수만 2만개가 넘고 그중 1천700개는 스스로 만들어냈다. 그 셰익스피어를 독보적인 자리에 올려놓은 작품이 ‘햄릿’이며 아직까지도 이를 넘어서는 작품은 거의 없다. 그가 나중에 쓴 ‘리어 왕’이 아마도 유일한 예외가 될 것이다.
‘햄릿’은 누구나 아는 바대로 덴마크의 왕자 햄릿이 억울하게 죽은 부왕의 복수를 하는 것이 줄거리다. 그러나 이는 그의 많은 작품이 그렇듯 창작극이 아니다. 덴마크의 전설을 기반으로 12세기 삭소 그라마티쿠스가 ‘덴마크의 역사’에 기록한 것을 후대 프랑스의 프랑스와 드 벨포레스트와 영국의 토머스 키드가 연극으로 만들었고 여기서 영감을 얻어 셰익스피어가 다시 쓴 것이다.
원작은 왕의 동생이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다. 당시 어린아이였던 암레투스는 미친 척 하며 왕의 마수를 벗어나 장성한 후 왕과 부역자들을 모조리 처형하는 것이 줄거리다. 여기서는 왕의 유령이 나타나 진실을 말할 필요가 없다. 모두가 새 왕의 범죄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 작품에서는 왕이 자는 사이 독살당하고 뱀에 물려 죽은 것으로 포장된다. 왕의 유령이 등장해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고 아들 햄릿에게 복수를 부탁하는 것으로 이 비극은 시작된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의 냄새로 진동한다. 부왕에 이어 새 왕의 집정 대신 폴로니우스가 죽고 그의 딸 오필리아가 죽고 이어 햄릿의 친구 길덴스턴과 로젠크란츠가 죽고 마지막 결투 장면에서 폴로니우스의 아들 라에르테스와 왕비 거투르드, 왕 클로디우스와 햄릿이 모두 사망한다. 주인공이 이처럼 남김없이 죽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사람만 죽는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의 백미인 햄릿의 독백은 삶의 부질없음과 죽음에 대한 명상으로 가득 차 있다. 유령이 나타나기 전부터 햄릿은 세상에 절망적인 상태다. 1막2장에 나오는 “이 세상은 나에게 얼마나 지겹고 맥빠지며 김빠지고 무익한 곳인가. 이건 그건 잡초만 무성한 정원이야”라는 대사가 그의 심정을 말해 준다.
2막 2장에서는 세계와 인간에 관한 명대사가 나온다. “대지는 황량한 곶이고,,, 창공은,,, 나에게 더럽고 병든 연기의 합일뿐. 인간은 얼마나 멋진 작품인가, 고귀한 이성과 무한한 능력, 정확하고 멋진 모양과 움직임, 행동은 천사 같고 이해력은 신 같고, 세상의 아름다움이자 동물의 완성이지. 그러나 나에게 이 먼지의 정수는 뭐란 말인가. 남자는 나를 즐겁게 하지 않고 여자도 마찬가지야.”
3막1장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대사가 등장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다. 끔찍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견디는 게 더 훌륭한지 문제의 바다에 맞서 무기를 들고 싸워 끝내는 게 더 나은 것인가… 죽음으로써 육체가 겪어야 하는 천개의 불가피한 충격을 끝내야 하는 것인가… 아무도 모르는 돌아오지 못하는 죽음 뒤에 일어날 일이 두렵지 않다면 누가 시간의 매와 경멸을, 압제자의 잘못을, 오만한 자의 모욕을, 멸시당한 사람의 고통을, 더딘 법의 집행을… 견디겠는가.”
4막에서는 햄릿이 왕의 시체를 먹은 벌레로 미끼로 잡은 생선을 먹는 거지 이야기가, 5막에서는 한 때 세상을 호령하다 한줌 흙이 돼 병마개로 잔락한 알렉산더, 날리던 재담꾼이었지만 이제는 한갖 해골로 변해 이리저리 던져지는 신세가 된 요릭 이야기가 나온다.
이 작품이 이처럼 죽음 이야기로 가득 찬 것은 이것이 쓰여지게 된 1600년 전후 셰익스피어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596년에는 셰익스피어의 유일한 아들 햄닛이 전염병으로 죽었고 1601년에는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고 보호자였던 에섹스 경이 반란을 일으키다 처형됐다. 셰익스피어 극단은 반란군을 옹호하는듯한 연극을 공연했다 같은 운명에 처해질 위험에 놓여 있었다.
겨우 죽음을 모면하기는 했지만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죽음이란 주제에 그의 생각을 집중하게 했을 것이 틀림없다. 요즘 아들 햄닛과 연극 ‘햄릿’과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한 영화 ‘햄닛’이 상영중이다. 햄닛과 햄릿은 당시 같은 이름이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어떻게 죽어야 하느냐는 문제와 직결돼 있다. 아무리 위대한 인간도 겨울 숲속의 일몰을 피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인간이 처한 상황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누구보다 장엄한 언어로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 매슈 아놀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위대한 극작가로 평한 소포클레스를 “인생을 흔들림 없이, 그 전체를 본” 인물로 묘사했는데 셰익스피어에 대해서도 똑같은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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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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