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무모하다. 새해 일출을 보겠다고 태백산 등산팀을 따라간 적이 있다. 몇년 전이니 그때만 해도 좀 젊어서 무모할 용기가 있었다. 산을 다니지 않는터라 겨울 산행 준비도 엉성해서 아이젠 끼우는 법도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니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겨울산도 처음이고, 딱히 운동 신경도 없는 나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배려해주며 올랐을텐데, 고맙다고 제대로 말도 안한 것 같다. 그저 기가 막힌 풍경 속에서 말을 잊었던 것도 같다. 겨울산을 오르는 일은 온전히 나를 만나는 일이다. 세찬 심장과 붉은 뺨과 뜨거운 숨 끝의 존재를 맞닥뜨리는 일이다. 아아, 더는 못가겠어 시시각각 찾아오는 한계를 느낄 때면 비현실적인 풍경이 신기루처럼 손짓했다. 조금만 더 와, 더 깊이 와.
눈은 현실을 덮는다. 거친 들도 앙상한 숲도 얼어버린 강도 비현실적으로 만들어버린다. 은폐보다 관용같다. 눈의 착시, 잠깐의 환상을 선물해준다. 우리의 삶은 형광등 아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종종 남루하고 쓸쓸하다. 늘 그 속에 살지만 또 우리는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을 꿈꾸기도 해. 삶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는 곳, 마음이 한없이 고양되는 곳, 존재의 경계가 없는 곳. 눈 덮인 길을 걸으며 눈 쌓인 풍경을 바라볼 때에 바로 그 꿈이 실현된다. 잠깐 사이 펄펄 퍼부은 눈이 우리의 쇠락을 모두 감춰주니까.
겨울의 태백산은 그 명성만큼 대단했고 아름다웠다. 그런데 나는 정상의 천제단이라거나 커다란 표지석은 별 감흥이 없었다. 기억나는 건 가도가도 눈 덮인 산길, 눈 쌓인 주목, 앞 사람의 갈색 등산화와 자주 뒤돌아보며 천천히 와요 기다려주던 모습. 난 그 때 겨울산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사람 사이의 거리에 대해 생각했다. 겨울산은 처음엔 나란히 걸으며 웃음 소리 정겹다가도 곧 혼자 걷게 된다. 눈 덮인 산길을 타박타박 오르는 그 거리가 좋은 관계의 알맞은 거리가 아닐까 여겼다. 내 숨과 존재가 지켜지는 거리, 당신의 마음과 배려가 느껴지는 거리, 누군가 갑자기 미끄러져도 손 내밀 수 있는 거리. 어쩌면 관계에도 아름다운 거리가 있다는 생각을 내내 했다. 안간힘을 다해 겨울산을 오르며 나는 그 거리를 찾은 것도 같았다.
그 시절 함께 산행을 갔던 분들과 얼마전 저녁을 먹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까맣게 잊고서 겨울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사는 일에 바쁘니 어쩔 수 없잖아로 눙치기는 싫다. 했던 얘기 또 한다고 구박 받아도 그 때의 겨울산 이야기는 만날 때마다 하고 싶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르고 또 오르던 겨울산, 너무 힘들어도 눈 앞의 설경이 이끌어주던 여정, 우리의 삶을 가만히 덮어주는 그 눈길 속에서 앞에 걷는 사람도 그 자체로 풍경이 되던 그 날. 당신이 내밀어 준 손을 경계없이 잡았던 생의 온기를 두고두고 아로새겨두고 싶은 것이다.
<임지영 (주)즐거운 예감 한점 갤러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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