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유난히 매서웠다. 폭설이 내리고, 녹기도 전에 다시 얼어붙은 길 위에서 우리는 계절의 혹독함을 실감했다. 그러나 아무리 긴 한파도 결국 봄을 이기지 못한다. 얼음은 녹고, 땅속의 씨앗은 깨어난다.
산과 들, 강과 바다는 저마다의 생명들이 어우러지며 본래의 질서를 회복한다. 나무와 풀, 짐승과 새가 ‘산’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제자리를 찾고, 물고기와 미생물, 곤충과 새가 ‘물’이라는 터전 속에서 서로 기대어 살아간다.
존재는 홀로 완성되지 않는다. 함께일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
인간 역시 다르지 않다. 우리의 정체성은 공동체 속에서 형성되고 다져진다. 언어와 문화, 기억과 역사, 그리고 함께 겪은 시간들이 모여 ‘나’를 만든다. 공동체가 없다면 정체성도 공허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랜 세월 땅을 일구고, 말을 나누고, 문화를 축적하며 자신만의 공동체를 세워왔다. 한국인이라는 이름도 그렇게 형성된 역사적·문화적 공동체의 결실이다.
3월 1일, 3·1절은 그 공동체적 정체성이 가장 뜨겁게 분출된 날이다.
1919년, 식민 통치 아래에서 맨손으로 거리로 나섰던 선조들은 단지 주권 회복이라는 정치적 목표만을 외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외친 “대한독립 만세”에는 ‘우리’라는 공동체의 존엄을 지키겠다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나라를 빼앗긴다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을 부정당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붕괴는 정체성의 상실로 이어진다. 그들은 그것을 알았기에 두려움 속에서도 침묵하지 않았다.
오늘을 사는 코리안 아메리칸에게 3.1절은 과거의 기념일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두 공동체 속에서 살아간다. 한국인의 역사와 문화를 뿌리로 삼으면서, 동시에 미국 사회의 시민으로 책임을 다한다. ‘코리안 아메리칸’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혈통의 표지가 아니라, 두 공동체에 대한 소속과 책임의 선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미국에서 태어난 젊은 세대 중에는 “너는 어디서 왔니?”라는 질문 앞에서 잠시 멈칫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스스로를 미국인이라 여기지만, 타인의 시선은 그들을 ‘한국인’으로만 규정하기도 한다. 그 간극에서 정체성의 혼란이 생겨난다.
이 혼란을 줄이는 길은 분명하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역사와 의미를 정확히 알고, 그 뿌리를 자각하는 것이다.
뿌리를 안다는 것은 과거에 머문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현재의 자신을 더 단단히 세우는 일이다. 부모 세대가 자녀에게 물려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유산도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어떤 이야기를 품은 공동체의 일원인가.
공동체가 약해지면 정체성은 흔들리고, 정체성이 흔들리면 공동체 역시 힘을 잃는다.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외쳤던 독립의 함성은 공동체를 회복하려는 외침이었다. 그 정신은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어져야 한다.
코리안 아메리칸 공동체의 미래 역시 참여 속에서 자란다. 유권자 등록을 하고, 선거에 참여하며, 지역 사회의 의사 결정 과정에 목소리를 내는 일은 단순한 시민의 권리 행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사회의 책임 있는 구성원임을 선언하는 행위다. 공동체의 권익은 저절로 보장되지 않는다. 참여와 연대 속에서 비로소 확장된다.
올해 3.1절을 맞으며 다시 묻는다. 나는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는가. 그리고 그 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뿌리를 자각하고 책임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선조들이 지키고자 했던 ‘우리’라는 이름을 오늘에 되살리는 길이다. 그 길 위에서 코리안 아메리칸 공동체는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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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찬/시민참여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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