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함 격침시킨 최초의 잠수함 ‘헌리’ 136년만에
적함을 격침시킨 최초의 잠수함 H.L. 헌리호가 136년만에 동부 사우드 캐롤라이나의 찰스턴 항 해저에서 인양됐다.
남북전쟁시절 남군소속이었던 이 잠수함은 8일 인양돼 예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구경꾼들의 갈채와 환호속에 찰스턴항에 압항했다.
"사우드 캐롤라이나주는 물론 전국이 이 잠수함의 과학적,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에 경의를 표할 것이다"
헌리 인양위원회 위원장인 연방상원의원 글렌 맥코넬은 말했다.
작가이며 침몰선 탐사전문가 클라이브 커슬러에 의해 5년전 처음 발견된 헌리호는 남북전쟁당시 북군의 해상봉쇄를 깨려는 남군최대의 야심적인 시도였다.
남군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상봉쇄는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1864년 2월 17일 밤 헌리는 해전사의 중요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이날 밤 9시 헌리는 북군 전함 휴사토닉호의 함포사격을 뚫고 접근했다. 시속 3노트(3.5마일)의 속도로 돌진한 헌리는 휴사토닉호를 들이받았다. 충돌과 동시에 헌리호 함수에 장착했던 90파운드폭약의 어뢰가 휴사토닉호의 선체에 구멍을 내면서 박혔다. 헌리는 재빨리 함수를 돌렸다. 잠시 후 어뢰가 폭발하면서 휴사토닉호는 3분만에 대서양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기록에 따르면 헌리호의 승조원들은 잠수함의 출입구를 열고 해안에 있던 남군포대진지에 임무완수를 알리는 푸른빛의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헌리호도 곧 침몰하고 말았다. 그 원인은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후 많은 사람들이 잠수함 헌리호 수색탐사작업에 착수했다.
이 가운데는 서커스 흥행업자 P.T. 바넘도 끼어있었는데 그는 헌리호를 발견하고 인양하는 사람에게 10만달러를 주겠다고 제의하기도 했다.
침몰 후 미스터리로 남아있던 헌리호의 행방은 지난 1995년 5월 마침내 풀렸다.
15년동안 네 차례의 끈질긴 탐사작업 끝에 커슬러가 이끄는 내셔널 수중해양국이 찰스턴항 입구 30피트 해저에서 3피트의 진흙속에 묻혀있던 잠수함 헌리호를 찾아낸 것이다.
커슬러는 탐사비용 13만달러를 자신이 저술한 책의 판권료에서 조달했다.
원통형 철제 보일러의 모양에서 착안한 잠수함 헌리호는 길이 39.5피트, 폭 4피트, 높이 5피트로 설계됐다.
이 잠수함은 여덟 명의 승조원이 각기 다른 각도에서 크랭크축을 돌려 프로펠러를 회전시키는 인력추진 함선이었다. 승조원들이 크랭크축을 돌리는 완급에 따라 잠수함의 속도가 결정됐다. 잠수함의 진행방향을 정하는 키는 함장이 잡았다.
"이 잠수함은 물의 저항을 덜 받게 만든 디자인이나 철제 갑판등 당대보다 50년을 앞선 것이었다"
맥코넬의 설명이다.
8일의 인양작업에는 600톤짜리 기중기가 동원됐었는데 헌리호는 옛 찰스턴 해군 조선소로 옮겨져 7내지 10년동안 보관, 전시된다.
헌리호는 연방당국과 주정부와의 합의로 사우드 캐롤라이나주에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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