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는 말만 믿고 배에 올라탔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내린 곳은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중국 상해항이었고 그때부터 저의 몸과 마음은 철저히 유린당하기 시작했습니다"
경남 의령출생으로 17세가 되던 해인 1937년 어느날 공장에서 일할 여공을 모집한다는 말에 속아 별다른 의심없이 길을 떠났다가 일본군 위안부로 처절한 삶을 살아야 했던 김순덕 할머니(80). 해방 반세기가 지났지만 지금도 그때의 악몽은 도저히 지울 수 없다.
배에서 내린 직후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가졌지만 이미 항구앞으로 수십여대의 트럭이 어린 여성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고 억지로 타고 간곳은 폐허가 된 건물. 일본군은 그곳을 개조해 여러칸의 방으로 만들어 여성들을 하나씩 집어 넣었다. 그때까지도 김할머니는 얼마후 다가올 끔찍한 순간을 알지 못한채 벽에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해 군인들이 줄을 서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잠시후 인간의 탈을 쓴 늑대와 다름없었던 군인들에게 무자비하게 짓밟히기 시작했고 이같은 일은 매일 반복됐다. 함께 끌려온 많은 여성들이 병원으로 실려갔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는 경우도 목격해야 했다.
부대가 이동할 때마다 함께 따라 다녀야 했던 김할머니는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고 결국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일본군 고위장교에게 간청, 1940년 귀국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망그러진 몸과 수치심 때문에 고향 대신 서울로 향했고 오랫동안 남모르는 눈물을 흘리며 살아왔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하자 김할머니는 숨기고만 싶었던 과거를 밝히며 본격적인 일제 만행 규탄 및 손해배상 요구 운동에 참여해 왔다. 또한 지난 9월17일 미연방법원에 일본정부의 사과 및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역사적인 집단소송에 참여했으며 미국내 주요지역을 돌며 피해자들의 고통과 한, 분노를 담은 그림 전시회를 통해, 위안부 문제에 대한 미국사회의 관심을 고조시키고 있다.
19일부터 25일까지 로터스 아트갤러리(4265 W.3rd St, LA)에서 전시회를 갖기 위해 LA를 방문중인 김할머니는 13일 가진 기자회견에서 "일본정부는 역사적 진실을 숨기지 말고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과하는 것은 물론 배상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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