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이후 미국 가정에 입양, 성장한 입양인들의 뿌리찾기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는 12일 한국전 이후 10만명의 한국 고아들이 미국가정에 입양됐으며 약 2천5백명이 워싱턴 메트로 폴리탄 지역에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면서 한국 입양인에 대한 관련기사를 크게 다뤘다.
다음은 워싱턴 포스트지 보도 요지-
한국고아 입양은 70년대 절정을 이뤄 현재 성년이 된 이들이 자신의 뿌리찾기에 나서 그들의 부모 형제 찾기와 민족성 등 정체성 찾기에 나서고 있다.
이들 입양인들은 코리언-아메리칸 으로 살아가는 자신들의 삶을 나누기 위해’ 내셔널 입양의 달’을 기념하기도 하고 뉴욕에 본부를 둔 네트워크의 워싱턴 지부를 결성해 활동하며 ‘모국 방문’을 주선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수천명의 입양인들이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 또는 일가친척을 찾기 위해 모국을 방문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버지니아 스프링필드에 거주하는 미국 세관 조사관, 스티븐 대처(47세)씨는 6세때 뉴저지주의 미국인 중산층 가정에 입양돼 성장했다.
1950년대 중반 서울에서 자란 그의 기억에는 전쟁고아들이 미군들이 군용 트럭에서 던져 주는 껌과 사탕등을 받기 위해 아우성치는 모습이 유년의 추억으로 남아 있을뿐 부모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입양된 지 20년만에 오산 공군 기지에 배속받아 한국에 처음 나가 생모를 상봉했을때 그의 어머니는 흐느껴 울기만 했는데 그때 그는 아무런 느낌도 없이 그저 당혹스런 느낌뿐이었다고 회상했다.
그 이후 1970년대 입양인들의 뿌리찾기가 본격화 되면서 그의 ‘자신찾기’ 작업도 본격화 되기 시작했다.
이들이 친부모를 찾았을 때의 반응은 대체적으로 두가지로 기쁨과 반가움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반 정도는 앞서의 대처씨와 마찬가지로 정서적인 불안정을 갖는다는 것이다.
대처씨의 생모 전영재씨와 대처씨는 대처씨가 오산에 근무할 때 같이 근무하던 한국인 동료가 신문지상에 광고를 게재, 찾을 수 있었으며 대처씨는자신의 본명이 전송희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이후 대처씨는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가족과의 재결합을할 수 있었다.
대처씨는 일본에서 만난 한국여성과 결혼, 현재 스프링필드에 거주하며 15분 거리에서 의붓 여동생과 함께 거주하는 생모를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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