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사는 이야기
▶ 전효숙 (윌셔연합감리교회 지휘자)
"또 비가 오네"
나는 턱을 괴고 멍하니 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편은 재촉해 댄다. "흰색 코트 입어, 오늘은."
몇 번 이 옷 저 옷 뒤적거려보지만 나는 결국 흰색 코트를 집어들고 따라 나선다. "추우니까 목도리도 하고." 남편은 자동차에 시동을 걸며 소리를 쳐댄다. 웃음이 나오지만, 뻔하다. 비오는 날은 바닷가 찻집을 방문하는 날이다. 특별한 찻집이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비오는 날에 발굴해(?)낸 해변의 찻집만 해도 그 동안 수십 군데는 될 것이다.
나는 남편의 이런 박력이 싫지 않다. 못이기는 척 따라 나서기는 하지만, 그 사람은 이럴 때 가장 생기가 넘친다. 하지만, 요즘 부쩍 얇아진 그의 봉투는 가슴을 싸하게 한다.
기어코 동부의 사립대학에 가겠다는 아들의 얼굴은 점점 더 희망에 부풀어 생기를 더 해가고, 눈에 띠게 식사 량이 줄어든 그의 얼굴은 점점 더 시들어 가는 것만 같다.
오늘 찻집은 엄브렐라. 우산처럼 지붕이 둥글게 지어져 특이하지만, 초록색 창틀은 왠지 촌스럽게 느껴지는 곳이다. 물기를 털며 들어선 실내는 마치 40년대 흑백 영화의 한 장면처럼 썰렁하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아리아는 오히려 기괴한 느낌을 준다. 늙은 할아버지 몇이 초점 잃은 눈길을 보내고, 어울리지 않게 미니스커트 차림에 하얀 샤프론과 머리수건까지 둘러 멘 웨이트레스는 중년을 훨씬 넘긴 뚱뽀 아줌마이다.
남편은 사실 아직 기분이 썩 좋은 상태는 아니다. 며칠 전 쇼핑을 갔다가 일이 틀어져 버린 것이다. 쇼 윈도우에 걸린 분홍색 블라우스 앞에서 내가 예쁘다고 탄성을 지른 게 화근이었다.
사실 말이지, 옷이 예쁘다는 것이 반드시 그 옷을 입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기어코 나를 끌고 들어가 블라우스를 사 주겠다고 우긴다. 가격표는 분명 제 정신으로 매겨진 액수는 아니었다.
"미쳤어? 대체 얼만지나 알고 사주겠다는거야?" 우리 둘은 썰렁한 기분으로 백화점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나는 동부로 가겠다는 철없는 아들을 생각해야 했고, 그 사람은 갑작스레 톤을 높인 내 목소리에 무안했던 것이다.
뚱뽀 아줌마가 쉴새 없이 채워주는 커피는 따뜻한 김을 내고 있지만 그윽한 향내는 따로 돈 내고 주문을 해야 하는 모양이다.
남편은 아예 지갑이란 게 없는 사람이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 친정 엄마에게 드릴 예쁜 목걸이 하나 살 돈이 모자라 쩔쩔 맬 때 알아 봤어야 했다. 그 때부터 증세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증세를 악화시킨 장본인은 바로 나였다. 앞 뒤 가리지 않고 가끔씩 벌이는 그의 깜짝 쇼에 감동을 하고 환호성을 지른 것은 바로 나였으니까.
그 후유증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계산기 두드리며 가계부를 깨알처럼 적어 가는 일은 나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살림이 언제 거덜 날지 모른다는 일종의 사명감이었던 것이다.
창 밖의 빗줄기가 더욱 거세어 지고, 남편의 순진하고 철없는 눈망울은 오늘 따라 더욱 크기만 하다. 어울리지 않게 "Time to Say Good-bye"가 낡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다. 떠날 시간이라고? 그래, 언젠가는 우리가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 나는 또다시 돌이킬 수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여보, 나 말이야, 사실은 그 분홍색 블라우스 입고 싶은데, 사 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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