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일기.
정수헌<내과의사>
DNR
병원에서 쓰는 말 중 DNR이라는 약자가 있다. ‘Do Not Resuscitate’의 머릿글자로 인공소생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사람의 생명만큼 귀한 것은 없지만 그 귀한 존엄성의 가치와 기준이 항상 문제가 된다. 생명의 질과 양은 측정할 수도 없거니와 생명에 대한 각 개인의 철학적, 종교적 견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의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생명의 연장은 물론이고 생명의 비밀암호인 게놈까지 해독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근본적인 치료를 못하는 질병은 수없이 많아 어디까지가 최선을 다하는 것이며 어디에 선을 그어 인간생명의 가치와 존엄성을 지켜야 하는가가 크나큰 과제이다.
몇 년전 내가 근무하는 굿사마리탄 병원에서는 암이나 중풍 등의 질환으로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의 생명연장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위원회를 조직하는 방법을 시도했었다. 각 케이스별로 위원회에 환자가족과 주치의가 기본적으로 들어가고, 그외 종교계, 법조계, 학계에서 각 한 사람씩, 그리고 의사와 일반 보통사람이 참여하게 했다.
한 인간의 생사를 좌우하는 위원회인 만큼 환자의 생명연장 여부는 만장일치로 결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그러나 여러 말기 만성 질환자들 케이스를 의논하는 동안 한번도 만장일치에 이르지 못해 위원회 제도는 결국 중단되었다. 위원회의 구성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만큼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미 뇌사상태에 빠진 중풍환자에게 튜브 영양공급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링겔만 계속할 것인가, 폐렴이 오면 항생제를 시작해야 할 것인가, 말기 암환자의 심폐기계를 언제 중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담당의사나 가족들에게 어려운 결정을 강요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누가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없으며 의학상식이 있거나 의사라고 해서 최선의 결정을 내렸다고 할 수가 없다. 생명을 보는 가치 기준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돌이킬 수 없는 말기질환의 환자들이 병원에 들어오면 담당의사는 가족들에게 DNR의 여부를 묻는다. 많은 가족들은 화를 내거나 당황해서 결정을 못하거나 늦추게 된다.
DNR의 여부가 확실하지 않은 말기환자가 심폐기능이 정지되면 자동적으로 인공 소생팀을 소집하게 되어 심장 압박술을 비롯한 모든 방법을 쓰게 된다. 만약 환자가 돌이킬 수 없는 말기환자라면 인공소생 시술로 인한 추가 고통 속에 대개는 사망시간만 연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한번은 혹은 여러 번 개인적으로 겪어야 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DNR의 필요성과 생명의 가치, 존엄성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수많은 환자들의 임종을 지켜보는 의사들도 가치관의 차이로 의견을 달리한다. 왜냐하면 의사들도 인간에 지나지 않고 하느님만 정답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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