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1세들에게는 추석이나 설날, 아니면 생일이나 잔칫날이 되어야만 맛있는 음식을 양껏 먹을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거의 모든 살림살이가 어려웠던 그 옛날에는 먹고싶은 것이 있다 하여 금방 사먹을 만큼 물자도 풍부하지 못해 한여름 과일을 겨울에 먹기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설날이 다가오면서 나는 서울 친정에서 차례를 지낸 후 모든 친족들이 나누어 먹던 비빔밥이 너무도 먹고싶다. 김이 오르는 하얀 밥이 담긴 대접 위에 무나물, 시금치, 미역 등 각종 나물을 올린 다음 깨소금 간장에 비벼서 소고기와 무·두부를 잘게 깍둑썰기 하여 만든 탕국과 함께 먹고싶다.
기제사 때는 자다가 일어나서도 달게 한 그릇을 다 먹고 거뜬하게 소화 시켰던 그 비빔밥을 먹어본 지 참으로 오래 되었다. 기제사나 명절에 맞춰 한국에 가기가 쉽지 않으니, 또 똑같은 음식이라도 이곳에서 만들어 먹으면 맛이 전혀 다르다.
나이가 들면서 어려서 먹던 음식이 자꾸 먹고싶다.
작년 여름 한국에 갔을 때는 가자미 넣은 미역국을 먹고싶어 부산 해운대 일대 식당을 다 뒤졌어도 찾지 못했다.
시원한 국물에 새하얀 가자미 살이 입에서 스르르 녹는 맛을 못내 아쉬워하자 올케가 가락동 수산시장에서 가자미를 못 구해 대신 광어를 사다가 국을 끊여주었었다.
비린내가 전혀 나지 않게 온갖 정성을 다하여 끓여주었으나 생선살이 조금 두꺼웠고 미역이 좀 거칠었다.
또한 새벽이면 재첩국 다라이를 이고 동네마다 돌아다니며 "재첩국 사이소, 재첩국 사이소."를 통통 튀는 목소리로 외치던 아주머니가 있었다. 가늘고 연한 부추를 잘게 썰어 국에 띄워 먹으면 손톱 크기 만한 재첩 알맹이가 혀에 달큼하게 씹혔다.
뽀얀 그 국물 맛을 잊을 수가 없어 한인마켓에서 파는 포장용 재첩국을 자꾸만 사먹어 보지만 깊은 강물 냄새가 날 듯 말 듯, 미적지근한 그 맛은 늘 후회하게 만든다.
추어탕 맛은 또 어떤가.
가끔 소금 뿌린 미꾸라지를 덮어씌운 양재기를 힘껏 누르는 일이 어린 내게 주어졌다. 양재기 위로 탁탁 온몸을 부딪쳐오는 미꾸라지의 움직임이 전해지면 싫으면서도 몹시 간지럽던 그 감촉!
폭 고아진 미꾸라지의 뼈와 껍질은 체에 걸러지고 살만 남아 고추장·된장으로 간맞추고 호박잎, 시래기 배추, 갓채 등을 잔뜩 넣어 얼큰하게 끓인 다음 매운 산초가루를 듬뿍 쳐서 땀을 뻘 뻘 흘리며 먹으면 그 개운한 맛이 최고였다.
뉴욕에 와서 추어탕집을 찾아가 먹어보지만 "이 맛은 아니야.", "이 맛도 아니야."하고 번번이 고개를 젓는다. 지방마다, 사람마다 조리법이 다르다보니 내 입맛에는 그저 톱밥 같이 텁텁하기만 하다.
음식은 또 같은 재료, 같은 조리법이라도 주부의 손맛 따라 다르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맛있다고 소문난 집을 순례하던 화려한 맛의 시기를 지나 지금은 무조건 어렸을 때 먹어본 맛이 제일이다.
엄마가 만들어 주던, 육개장도 아니고 무국도 아닌 국물이 달고도 시원한 소고기국, 밥맛을 잃었을 때 금방 입맛을 돌려주던 콩죽, 찹쌀과 멥쌀을 넣어 푹 퍼지게 쑨 닭죽 등등 나는 그 맛을 되살려 보려고 기를 써보지만 도무지 비슷하지도 않다.
요즘 아이들도 훗날 엄마가 만들어 주던 음식 맛이 최고라고 할까?
그러나 주부라고 음식 솜씨가 다 있는 것도 아니고, 주말 아이들 식사는 패스트푸드로 때우는 엄마들이 많지 않은가.
물론 나도 마찬가지인 것이 아이들이 내가 해준 음식을 먹고 맛있다고 한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아이들 고모나 할머니가 해주는 감자전, 칼국수, 탕수육, 김치전 등의 음식에 밀리고 있다.
그래도 내게는 아직은, 아마 앞으로도, 어떤 일류 음식점 요리보다 친정 엄마가 어려서 해준 음식 맛이 최고일 것이다.
갑자기 엄마가 돌아가신 후 이제는 엄마가 해주던 그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가 없겠구나 싶어 더욱 서러웠다면 나는 불효자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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