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님을 먼저 보내고 혼자되신 목사님을 장례식이후 몇 달만에 처음으로 만났다. 사모님이 살아 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차림새도 반듯하시고 얼굴도 밝아 보였다. 워낙이 단정하신 분이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으신 분이었지만 그 반듯함이 혼자되고 나서도 여전하셨다. 그 모양새에 용기를 얻어서 어떻게 지내시느냐고 여쭈어 보았다. 그랬더니 목사님의 솔직한 대답은 뜻밖에도 심각했다. "충격이 이렇게 클 줄 몰랐습니다. 모든 일에 의욕을 상실했어요. 왜 살아야 하는 건지, 정말로 죽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목사의 입에서 죽고싶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배우자를 잃은 상실감이 엄청날 줄은 몰랐다. 목사님 자신도 실제로 당하기 전에는 정말로 몰랐단다. "우린 나름대로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집사람이 오래 아팠기 때문에 충분히 준비할 여유가 있었고요. 죽음이 임박해서는 죽음에 대한 이야
기도 서로 솔직하게 나누었죠. 죽음이후에 있을 천국에 대한 확신도 다짐하고 또 다짐하고 했었어요. 그런데 막상 가고 나니까 생각과는 전혀 다르네요. 무엇을 해야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어요. 심지어 주일날 설교조차 왜 해야하나 하는 마음이 들어요. 어쩌면 소명이 흔들릴 정도로 상실감의 충격은 대단합니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나는 그 목사님의 솔직한 고백에 할 말을 잃었다. 그렇다. 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고통이다. 어떻게 위로의 말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들은 이야기로는 남은 사람에게는 먼저 간 사람에게 못해준 기억들만 부각된단다. 아무리 잘 해줬어도 잘 해준 것보다는 마음 아프게 해 준 것들만 기억이 나서 괴롭단다. 괴로워한 들 미안하다는 말도 들어줄 사람이 없고 용서를 구하거나 돌이켜 잘 해 주고 싶어도 상대가 없으니 그 한이 더 크다고 한다. 이럴 때 사람들이 그리워하고 다짐하는 것이 저 세상이다. 나중에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면 그 때 미안하다고 해야지. 그 때 못 다한 사랑해야지. 그런 위로와 소망을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성경에 의하면 부부사이의 인연은 이 세상의 것이 전부이다. 천국에서의 삶에는 더 이상 부부의 인연이 존재하지 않고 모두가 천사들처럼 살게 된다 (누가복음 20장 27절-40절 참고). 각박하고 무정하게 들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누리는 부부의 관계는 얼마나 중요한가. 한정된 것이고 다시 누릴 수 없는 것이기에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고 오늘의 함께 함이 소중한 것이다.
목회자의 직업상 많은 사람들을 상담하게 되는데 그 가운데는 부부생활에 대한 상담이 적지 않다. 대개 결혼생활이 십 년 정도가 지나면 사랑의 열정이 식어지면서 갈등들을 많이 겪는 것 같다. 분명히 사랑을 해서 결혼을 했고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고 싶은데 이상하게 관계가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마음이 전과는 같지 않다고들 한다. 그러면서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 "내가 여전히 저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가?", 혹은 그 반대로 " 저 사람은 나를 정말 사랑하는 걸까?" 이런 질문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던진 그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이 석연치가 않다는데 있다. "정말로 사랑하느냐?"하는 질문에 "그래, 정말로 사랑한다. 이것이 내 사랑이다."라고 선뜻 대답하기가 쉽지가 않다는 말이다. 그런 확신이 서지 않을 때 당황하게 되고 혼란스럽고 심지어는 죄책감마저 느끼기도 한다. 그 다음에는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기 위한 몸부림이 뒤따른다. 모든 에너지를 사랑하는데 쏟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확인하는데 쏟아 붓게 된다. 사랑이라는 것이 묘해서 그 속에 잠겨있으면 너무 풍성해서 귀한 줄도 모르고 누릴 수 있는 것이지만 일단 의심을 가지고 확인하려고 들면 오히려 더 붙잡기 어려운 것인지라 사랑을 확인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 힘들어지기 마련이다. 이런 갈등이 쌓이면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힘들어하면서 같이 사는 것은 위선이다. 차라리 사랑하지 않는다고 인정하고 헤어지는 것이 인간적인 것이고 솔직한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런 결론은 사랑에 대한 인식오류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사랑은 어느 순간부터 방법이나 모양이나 감동이 아니라 삶이 된다. 그럴 때 사랑은 증발해 버린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녹아든 것이다. 그리고 부부는 서로의 사랑을 마주 바라보는 자리에 있지 않고 이미 서로의 사랑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오히려 확인이 어려운 것이다. 마치 물을 의식하는 물고기가 없고 숨쉴 때마다 공기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숨쉬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귀한 것들이 없어질 때는 안다. 그래서 이미 사랑 안에 있는 사람들은 사랑을 확인하려고 하기보다는 사랑을 믿어야 한다. 믿음으로 누려야 한다. 사랑만 하고 살기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충분하지 않다. 어차피 한 쪽이 먼저 가고 난 다음에는 확인하고 싶지 않아도 가슴 저미도록 확인이 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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