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김용범 정책실장의 글을 읽으며 금융 현장에서 오랫동안 느껴온 문제의식이 다시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금융의 다른 말은 ‘신용’이고, 신용은 결국 ‘믿음’이다. 숫자와 담보, 모델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금융의 본질은 사람과 기업의 미래 가능성을 믿고 자본을 연결하는 데 있다.
다만 이 믿음은 무조건적인 낙관이 아니며, 금융은 ‘믿기 위해 의심하는 산업’이다. 의심과 분석은 거절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더 책임 있게 믿기 위한 과정이어야 한다. 의심이 목적이 되는 순간 금융은 본래의 기능에서 멀어진다.
슘페터가 말한 금융기관의 역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금융은 단순히 돈을 보관하거나 안전한 곳에만 배분하는 장치가 아니다. 사회가 가진 자본을 더 생산적인 곳으로 이동시키고, 혁신과 도전의 위험을 인수함으로써 경제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제도다.
그럼에도 한국 금융은 오랫동안 위험을 해석하고 인수하기보다 회피하는 데 익숙해져 왔다. 은행은 가장 안전한 고객에게 가장 낮은 금리를 제공하고, 증권 업계와 자본시장은 이미 검증된 거래에 안주해 왔다. 그 결과 금융이 가장 필요한 영역과 충분히 기회를 만들 수 있는 영역은 오히려 시장 밖으로 밀려났다.
김 실장의 문제 제기는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리고 있다. “가장 어려운 사람이 왜 가장 높은 비용을 치르는가”라는 질문은 감성적 구호가 아니라 현재 금융 구조의 정교함을 묻는 본질적 문제다. 금융기관이 공적 신뢰에 걸맞은 역할을 하고 있는지 되짚어야 할 시점이다.
신용등급과 과거 데이터는 물론 중요하지만, 과거만으로 미래를 판단하는 것은 백미러만 보고 운전하는 것과 같다. 백미러만 보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금융이 진짜 해야 할 일은 과거의 기록을 기반으로 하되, 그 이면에 있는 변화와 회복, 성장 가능성을 함께 읽어내는 것이다.
스타트업 투자나 중신용자 금융에서도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과거의 숫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미래의 가능성까지 배제한다면 금융의 역할은 애초에 성립하기 어렵다. 금융의 본질이 신용, 즉 믿음이라면 금융기관은 미래를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찾아내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문제는 개인의 태도보다 조직의 구조에 있다. 절차와 규정은 개인을 보호하지만, 어느 순간 금융의 목적을 가리는 장벽이 되기도 한다. 절차 준수가 성과의 지표가 되고, 부실률을 낮추는 것이 유일한 목표가 되면 금융기관은 위험을 인수하는 조직이 아니라 회피하는 조직으로 변한다.
제프 베이조스가 아마존 주주서한에서 지적했듯 절차는 결과를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 절차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조직은 “우리는 규정을 지켰다”고 말할 뿐 결과에 책임지지 않는다. 금융 업권에서도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말이 반복될 때 믿음을 만드는 기능은 약화된다.
현장에서 업계 종사자들에게 위험 인수는 결코 쉽지 않다. 개인이 과감하게 판단하고 싶어도 내부 평가체계가 부실 회피와 단기 손익 관리에 맞춰져 있다면 위험 회피가 더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결국 한국 금융의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제도와 KPI 구조에 있다.
이 때문에 금융개혁의 핵심은 상품 확대나 금리 조정이 아니라 평가체계의 변화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위험을 회피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정교하게 위험을 이해하고 구조화했는지를 평가해야 한다. 새로운 신뢰의 근거를 만들어낸 성과가 인정받아야 한다. 위험은 언제나 존재한지만, 이것을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금융은 책임 있는 금융이라 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위험을 더 잘게 나누고, 더 정확히 이해하며, 감당 가능한 형태로 인수하는 능력이다.
투자 역시 같은 원리로 작동한다. 실패는 단순한 손실이 아니라 기회를 놓치는 데서도 발생한다. 위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가능성을 외면하는 것, 그것이 금융과 투자의 진짜 실패일 수 있다.
김용범 실장의 글은 금융에 대한 비판이자 동시에 기대라고 본다. 한국 금융이 신뢰를 회복하려면 안전한 성 안에 머무르기보다, 성 밖의 사람과 기업을 더 정교하게 이해해야 한다. 은행과 자본시장은 끊어진 신용의 연결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한국의 금융이 계속 안전한 고객만 선별한다면 그것은 금융이 아니라 단순한 선별 장치에 가깝다. 금융의 본질은 아직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가능성을 읽고, 그 위험을 사회가 감당 가능한 구조로 바꾸는 데 있다. 금융은 믿음의 제도이며 믿음은 더 깊이 이해하고 책임 있게 위험을 나누는 데서 출발한다. 이제 한국 금융은 위험을 피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위험을 이해하고 인수하며 자본을 생산적인 곳으로 재배분하는 금융으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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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일 케이유니콘인베스트먼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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