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개관한 ‘데이빗 게픈 갤러리’는 영구소장품의 전시를 위한 공간이다. 전에 아만슨 빌딩과 해머 빌딩의 여러 층에 분산 전시됐던 유럽회화, 아시아미술, 의상과 직물, 이집트와 아프리카미술품을 한 곳에서 보여주도록 지어졌다.
라크마는 15만5,000점의 소장품 가운데 이번 개관전에 약 3,000점을 설치했다. 45명의 큐레이터가 협업해 전시를 구성했으며, 앞으로도 주제에 따라 교체하며 계속 새로운 소장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지난주에 썼듯이 데이빗 게픈 갤러리의 특징은 서구적 시각에 따른 미술사의 위계질서를 없애고, 백과사전식 미술관을 해체한 것이다. 6,000년에 걸친 작품들을 시대, 국적, 매체별이 아닌 주제별 기획을 통해 모든 예술품의 평등한 배치를 시도한다.
이 혁신적 개념에 따라 만든 첫 전시는 4개 해양(대서양, 태평양, 인도양, 지중해)을 축으로 이어지는 문화의 이동과 교류, 연결을 주제로 삼았다. 하지만 섹션의 구분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고, 동선이 계속 얽히며 휘어지기 때문에 주제를 의식하며 관람하기란 쉽지 않다. 사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 그저 안내책자의 제목처럼 발길 가는 대로 ‘방랑’(Wander)하다보면 곳곳에서 라크마가 자랑하는 수많은 예술품들과 조우하게 된다.
반가운 것은 한국 미술품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서도호가 라크마의 위촉으로 제작한 ‘경복궁 자경전’(2026)과 김수자의 6채널 비디오 ‘바늘 여인’(2005)이다.
분홍빛 감도는 반투명 천을 전통바느질로 재현한 서도호의 작품은 얼마나 섬세하고 아름다운지 경탄이 절로 나온다. 벽 하나를 차지하는 실물크기의 작품은 벽 안쪽의 방으로도 이어지는데, 방에는 자경전에 거주했던 신정왕후의 육순을 축하하는 8폭 가례도 병풍이 전시돼있어 시간과 공간과 역사를 잇는 신비한 여정을 완성한다. 이 방에는 또한 박서보, 이우환, 안영일, 이건용 등 현대 추상화가들의 작품도 함께 전시돼있다.
독립 전시실에서 상영되는 김수자의 ‘바늘 여인’(A Needle Woman)은 초월적이고 압도적이다. 6개의 영상은 네팔, 쿠바, 브라질, 차드, 예멘, 이스라엘의 번잡한 도시,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가는 거리 한복판에 고요히 서있는 작가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덧없는 세상의 물결 속에 흔들림 없이 서있는 바늘과도 같은 고독이 전율과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2009년 라크마의 한국현대미술 12인전에 전시된 후 뮤지엄이 사들인 작품이다.
이 외에도 사진작가 한영수의 1950~60년대 서울풍경 흑백사진 10점이 눈에 잘 띄는 벽에 걸려있고, 고려청자와 분청사기, 그리고 도자기 파편들은 따로 진열장 속에 전시돼있다.
놓치지 말고 보아야할 유명작품들은 앙리 마티스의 ‘라 제르브’, 프랜시스 베이컨의 ‘루시앙 프로이드’ 삼면화, 빈센트 반 고흐의 ‘타라스콩의 역마차’, 조르주 드 라 투르의 ‘등불 앞의 막달라 마리아’, 디에고 리베라의 ‘꽃의 날’ 등이 있고, 정교하게 재현된 다마스커스의 방도 경이롭다. 젊은 작가 로렌 할시의 라크마 위촉작 스핑크스(2026)와 대규모 벽면조각 또한 눈길을 끄는 작품.
2014년 억만장자 제럴드 페렌치오가 기증한 47점의 인상주의 및 현대미술작품들은 널찍한 방에 따로 모아 놨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할 만한 작품들이 모두 여기에 있다. 마이클 고반 관장에 따르면 페렌치오가 5억 달러 상당의 엄청난 컬렉션을 기증한 조건이 미술관의 신축이었다. 그로 인해 데이빗 게픈 갤러리의 건립이 활기를 띠었고, 연쇄적으로 큰 기부들이 이어졌다니 공로가 크다 하겠다.
밀폐된 전시장에서나 볼수있던 예술품들을 도시풍경과 함께 감상하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이 자연채광을 들이기 위해 360도 통 유리창에 섬유예술가 스도 레이코가 제작한 ‘빛 확산 커튼’을 설치했다. 직사광선과 자외선을 차단하면서 빛을 정제하고 분산시켜 내부를 보호하는 커튼이다. 물론 직물, 회화, 사진 등 빛에 민감한 작품들은 내부 갤러리에 전시돼있다.
콘크리트 벽이 작품 전시에 부적합할 것이란 우려도 사라졌다. 콘크리트와 결합하는 특별한 색소를 사용해 거칠고 불규칙한 표면을 우아하게 변형시켰다. 푸른색, 붉은색, 검은색 계열의 깊고 풍부한 색상이 오히려 소장품을 돋보이게 해준다.
갤러리 밖의 캠퍼스에도 이정표적 작품들이 많다. 입구에서 만나는 페드로 레예스의 대형조각물 ‘틀랄리’(Tlalli)가 압도적 존재감을 자랑하고, 아만슨 빌딩 내부에 있던 토니 스미스의 ‘스모크’도 야외로 나왔다. 로댕의 조각품들은 물론, 1965년 라크마 창립기념 위촉작인 알렉산더 칼더의 ‘3개의 퀸테인(헬로 걸스)’이 분수대에 새롭게 설치돼 움직이고 있다. 또 윌셔 남쪽에는 제프 쿤스의 꽃 조형물 ‘스플릿-로커’(Split-Rocker)가 들어섰는데 4만5,000개의 화초가 심겨진 이 원예조각은 시간이 갈수록 더 아름답고 향기로워질 것이다.
이 많은 작품들을 한 번에 다 보기란 불가능하다. 갤러리에서 두시간 넘게 걸었는데도 주마간산이었지 예술품을 감상한 것은 아니었다. 몇 번 더 가보려 한다. 그때마다 새로운 발견이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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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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