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물
▶ 7남매 권유로 회혼례 라정순.안화운씨 부부
60년이라면 한 사람의 일생으로도 짧지 않는 세월이다. 그러나 이같은 기간을 함께 살아온 노동(老童) 잉꼬 부부가 오는 9월2일 뉴욕장로교회에서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는 회혼례를 올린다. 프레쉬메도우에 살고 있는 라정순(82), 안화운(81)씨 부부가 바로 주인공이다.
1942년 8월20일 황해도 사리원에서 결혼한 이들은 그간 몇차례 위기와 죽음의 고비까지 맞았지만 신뢰와 슬기로 극복, 오늘에 이르러 주위로부터 부러움과 경탄을 사고 있는 것이다.
라정순씨가 안화운씨를 처음 본 것은 1941년. 일본 동경 중앙대 법과 유학시절 겨울 방학을 맞아 고향에 돌아왔을 때 중매장이가 안씨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한눈에 반해 다음해 여름방학때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신식으로 양복과 드레스를 입고 결혼,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대학졸업과 함께 귀국했지만 다시 학병으로 일본군에 징용돼 태평양전쟁에 나갔다. 일본 패망으로 추석날 귀국한 라씨는 아버지와 함께 첫 아들을 낳고 선산에서 차례를 지내고 있는 부인과 재화했을 때가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다고 회고한다.
그후 황해도 황주에서 판사와 변호사로 활동했다. 판사 시절 한 여성과 잠시 로맨스를 만들었다 혼이 났다. 부인이 이를 질책하지 않고 오히려 자살을 시도하는 바람에 반성과 함께 감동을 받았다. 이후 다시는 곁눈길을 보내지 않고 4남3녀를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왔다. 6.25가 발발하자 남한으로 피난했다 육군 법무관 채용 필기시험에 합격했다.
이북출신이라는 이유로 법조계에 발을 내딛지 못해 서울 광신상고에서 9년간 교직생활을 했다. 1964년에는 민정당 중앙감찰 위원으로 정치활동을 하다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아르헨티나로 망명 겸 이민길에 나섰다. 7남매를 이끌고 아르헨티나에서 그로서리, 봉제공장 등을 운영하며 아르헨티나 한인회장으로 뽑혀 한인이민 사회를 위해 봉사하기도 했다.
1976년 먼저 도미한 둘째 아들의 초청으로 뉴욕에 왔다. 라씨 부부는 봉제업계에 종사하다 13년전 은퇴, 지금은 막내 딸 내외와 함께 지내고 있다. 손주만 19명인 라씨 부부는 대뉴욕지구 상록회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상록농장에서 고추와 호박 등을 재배하는 라씨는 현재 뉴욕지구원로 성직자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결혼은 검은 머리가 흰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자신과의 맹세"라고 강조하는 안씨는 "남편에게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살아왔다"고 말한다.
<이민수 기자>
minsoolee@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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