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선교여행 중 하루 짬을 내어 깜뽕솜이라고 불리우는 남서쪽의 해안도시를 방문한 적이 있다. 킬링필드의 참상은 거의 치유가 되었지만 아직 전혀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캄보디아는 관광객들이 찾는 곳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깜뽕솜 해변은 거의 자연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람도 없고 소음도 없고 공해도 없고 심지어 모기도 없었다. 그런 외진 곳에서도 영어로 된 입간판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지만 그 간판에 쓰여진 글들이 또한 나를 매료시켰다. "세렌디피티 해변- 낙원의 한 조각 (Serendipity Beach- a little slice of paradise)". 어느 미국인이 은퇴하고 나서 그 곳으로 건너 가 자그마한 카페를 하나 마련해 놓고 그 앞에 붙여놓은 간판이었다. 그도 나처럼 우연히 이 해변을 발견했나보다. 그리고 그렇게 우연히 발견한 행운을 놓치기 싫어서 아예 이사를 왔을 것이다. 나를 방해하는 것이나 내가 신경을 써야 하는 요소들은 완전히 배제된 완벽한 휴양지에서 나는 꿈같은 하루를 보냈다. 단 하루였지만 그 하루의 휴식은 나에게 참으로 귀한 회복의 시간이었다.
세렌디피티(Serendipity)란 단어는 "우연히 마주친 행운"이란 뜻으로 쓰인다. 기대하지도 않았고 아무런 댓가도 지불하지 않았지만 그냥 나에게 안겨지는 행운이다. 그런 행운들을 가끔씩이라도 우리 인생에서 누리면서 산다면 삶이 무척 신선해지고 활력과 기대감이 넘실거리게 될 것이다.
어느 선교단체에서 선교훈련의 한 과정으로 보여주는 "바베트부인의 만찬"이란 영화가 있다. 덴마크의 외진 바닷가 마을에 마음씨 좋은 두 할머니 자매 필리파와 마티나가 살고 있는데 어느 날 프랑스 내전으로 남편과 아들을 잃은 바베트라는 이름의 여인이 찾아온다. 의탁할 곳이 없던 바베트 부인을 두 할머니는 따뜻하게 맞아들이고 바베트 부인은 두 할머니를 잘 섬기며 지낸다. 두 할머니는 마을에서 오랫동안 신앙적인 모임을 이끌어 왔는데 최근 들어 그 모임에 분열의 조짐이 보인다. 그래서 돌아가신 부친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만찬을 계획하고 그 만찬을 통해서 다시 그 모임의 친목을 다져보려는 생각을 한다. 한 편 바베트 부인은 우연히 복권이 당첨이 되어 일만 프랑의 돈을 얻게 된다. 두 할머니는 함께 기뻐해 주지만 반면에 이제 바베트가 프랑스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서운해한다. 그런데 바베트 부인은 자기가 그 만찬을 준비하겠노라고 자청한다. 사실 바베트 부인은 프랑스의 최고급 레스토랑의 일급요리사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바베트 부인의 모든 사랑과 정성과 재산이 몽땅 한 끼의 식사를 위해 투자된다. 만찬에 초청된 사람들은 한가지, 한가지씩 요리가 나오는 것을 보면서 그 맛과 그 정성과 그 재료의 고급스러움에 감탄한다. 부엌에서 요리하는 바베트 부인의 정성스러운 모습과 그 요리들이 식탁으로 옮겨질 때의 손님들의 감격의 표정을 교차해서 포착하는 카메라의 단순한 움직임이 조작되지 않은 순수한 감동을 자아낸다. 만찬이 끝났을 때 모두는 행복했고 다시 하나가 되었다. 바베트 부인은 그가 프랑스로 돌아가서 정착할 수 있었던 일만 프랑을 다 소비했다. 하지만 아무 생각없이 그 만찬에 참석한 사람들이 경험한 것은 엄청난 치유의 능력을 지닌 세렌디피티였다.
바베트 부인처럼 자신의 전부를 쏟아붓기는 쉽지 않겠지만 서로를 향한 조그마한 사랑과 정성만으로도 우리는 주변 곳곳을 세렌디피티로 장식할 수 있을 것이다. 낯선 사람에게 보내는 미소 하나. 누가 봐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고 심고 가꾸어 놓은 꽃 한송이. 뜻밖에 친절한 전화응답 한 마디. 모든 사람들이 서두르는 러쉬아워에 여유있는 미소로 차선을 양보해 주는 운전자.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일상적이고 당연한 일에 정성을 다하는 것. 이런 것들이 감동을 준다.
요즘 한인센터에서는 매 주 화요일에 정호웅 교수의 문학강좌를 열고 목요일에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대한 전호태 교수의 미술강좌를 연다. 우연히 참석한 지난 화요일, 정지용 시인의 시들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그는 우리 세대에게는 월북시인이라는 이유로 접근이 금지된 시인이었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의 시도 자유롭게 읽혀지고 연구되는 모양이다. 모처럼 듣는 문학강좌이기에 더욱 그랬겠지만 참 좋은 시간이었다. 알고보니 한인센터에서는 거의 매 분기마다 여러 분야에 걸쳐서 전문가들을 청빙하여 10주씩 지속되는 강의들을 개설하고 있단다. 대부분의 강사들이 버클리 대학이나 스탠포드 대학으로 초빙된 우수한 교수들인 것과 그들의 강의수준에 비하면 청강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 적은 것이 안타까웠다. 수강료도 없는데 말이다. 그러나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분명히 세렌디피티의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호응이 있건 없건 댓가지불을 마다하지 않고 양질의 강의를 지속시켜온 한인센터의 헌신에 감사한다. 개인이나 단체가 자기가 가진 것들을 남에게 내어놓기를 기뻐할 때, 그리고 그런 일들을 꾸준히 계속할 때,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다 많은 곳에서 세렌디피티를 경험하게 될 것이고 그런 사회는 확실히 살만할 것이다. 언젠가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도 "낙원의 한 조각"이라는 간판을 발견하게 되었으면 참 좋겠다."우리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남을 위해 베푼 것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답니다" "바베트부인의 만찬"에서 필리파 할머니가 남긴 대사가 오래도록 여운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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