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언제부터인가 귓가에 많이 들려오고 나도 모르는 사이 입안으로 흥얼거리던, 이제는 노래로 더욱 많이 알려진 고은 시인의 시(詩)가 이렇게 정겹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름 바다의 푸른 물결이 드넓게 펼처져 서러움의 코발트빛 눈물을 막 떨어드릴 것 같은 하늘이 드높게 열리고, 그 하늘아래 가냘픈 몸을 바람에 흩날리며 지나는 바람에게 엷은 웃음을 흘리는 연분홍 코스모스가 들녘 가득히 얘기보따리를 풀어헤치는 가을이 한참 무르익어 간다.
시집 한 권이라도 옆에 끼고 공원 벤치에 누워 꽃잎과 바람과 비밀이야기랑 몰래 나누고 싶고, 날으는 비둘기의 날개짓에도 하염없이 떨어지는 낙엽이 더욱 안타까이 가슴에 안기는 가을. 봄이 여인네들의 가슴에 설렘이라는 병을 불어넣는다면 가을은 고독을 찾는 남정네들에게 긴 그리움의 병을 안기는 계절. 누구나 다 시인이 되고 가수가 되어 사랑을 노래하고, 때로는 철학자가 되어 삶을 묻고 인생을 돌아보는 가을은 남자의 계절.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떠하랴. 그리운 사람이 있으면 그리운 사람에게, 보고픈 친구가 있으면 친구에게, 고향의 부모님의 얼굴이 떠오르면 부모님에게, 그 누구에게라도 이 가을이 가기 전에 편지를 쓰고 싶다. 가슴 속 끓어오르는 정열을 듬뿍 담아 뜨거운 열기가 전해지는 편지, 핑크빛 편지지에 지난여름 내내 말린 네잎 클로버를 고이 접어 넣고 첫사랑의 입맞춤을 기다리는 설렘의 연애편지, 받기만 하는 사랑에 잠시나마 보답할 수 있는 감사의 편지. 가을이기에 그 어떤 편지라도 다 좋을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 - 유치환,행복中에서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 밤하늘의 별들이 수억 광년의 세월을 한마음으로 달려오면서 나누는 사랑의 밀어들처럼, 초가지붕 위의 아직은 푸른빛을 띠는 조롱박에 더욱 빛을 발하는 둥근 보름달처럼, 이 가을에 커다란 행복의 결실을 하나 맺고 싶다. 타인으로부터 사랑을 기다리기 이전에 먼저 사랑을 나누는 행복을 맛보고 싶다. 사흘 밤낮을 꼬박 세워서 쓰는 장문의 편지가 아닐지라도 그 사람의 어깨에 가벼이 내려앉는 오후의 햇살만이라도 담아 보낼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내 마음의 우표를 떡 하니 봉투에 붙이고, 혹시라도 집배원이 수취인을 못 찾겠다 돌려보낼 지 모르니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일랑 대문짝 만하게 써야 좋으리라.
귀뚜라미 섬돌 밑에서 울어대기 시작하고 반딧불 하나 둘 창가에 집을 찾는 시간이 되면 정(靜)한 마음으로 펜을 들어 화롯불 속에서 익어 가는 할머니의 옛날얘기 같은 사연을 한 줄 한 줄 그려나가자. 제 몸을 불태워 작아져 가는 촛불처럼 나의 마음을 태우고 또 태워서 사랑하는 사람을 환희 비출 수 있는 사랑의 불씨도 담아 보내자.
전화, 전자메일, 팩스가 범람하는 정보화시대의 외톨이로 남아버린 편지. 그 옛날 우리와 같이 울고 웃으며 기쁨과 희망을 함께 나누고, 첫사랑의 아픔도 묵묵히 지켜주던 편지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젠 외톨이가 되어버린 그의 서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기 위해서라도, 이 가을이 한참 무르익어 가는 시점에 그저 가을이라는 핑계로 서랍 속 깊이 잠자고 있던 편지를 꺼내어보자.
사랑하는 사람아, 가을편지 익어 가는 사연에 가을밤은 하얗게 새는 줄도 모르고 있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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