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집엘 가도 집의 겉과 안 모습을 보면 그 집의 생활 형편과 법도를 가늠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며느리 고를 때 그 집 뒤 울안을 은밀하게 살펴본다는 "속선 보기"의 속설이 있었고, 같은 이치로 요즘에는 “사는 공간이 달라지면 사는 모습도 달라진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렇듯 우리가 거처하는 공간은 우리의 총체적인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렇다고 그 생활 공간을 거창하게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자연을 그 공간에 불러들이면 그것으로 족하다. 보다 쾌적(快適·몸)하고, 보다 활력(活力·마음)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래서 조선조 영조때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地)에서「사람은 양명(陽明)한 기운을 받아 삶으로 집 앞에 넓은 뜰이 있어서 낮에는 해, 밤에는 달과 별이 항상 환하게 비치고, 바람과 비, 차고 더운 바람이 고르게 알맞은 곳이면 인재도 나오고 병도 없다」고 했다.
이렇게 우리 선인들은 자연과 조화를 이룬 집터를 주거지로 존중했다. 그러나 요즘은 그게 아니다. 지리(地理), 생리(生理), 산수(山水) 인심(人心) 등은 반쯤 접어두고, 보다 큰집으로, 백인촌으로, 수위가 있는 담장 안으로, 학구(學區) 가까이, 직장 가까이 등 실리주의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 싶다. 물론 시속(時俗)에 따라야 하지만 인간은 자연과 등지고 살면 인간성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도 아울러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 또는 ‘인체는 소우주(小宇宙)’라는 말은 동양 의학에서나 다룰 감상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은 분명 자연의 일부요, 인체의 신비는 우주의 신비와 직결된다. 그 신비함 중에서도 오묘한 것은 ‘인간과 흙’과의 관계다. 그런데 지금 이 대지(大地)는 너무나 두꺼운 옷을 입고 있다. 다름 아닌 ‘시멘트 문명의 옷’이 그 것이다.우리는 시멘트나 석면이 들어간 횟가루 벽 집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을 달리고 걸어서, 역시 시멘트로 쌓아올린 건물 안에서 매일 무심코 일을 하고 있다. 하루 종일 흙을 밟아 볼 기회가 없는 것이다.
“지구는 살아 있는 흙더미다". 따라서 지구도 숨을 쉰다. 도시가 온통 콘크리트나 아스팔트로 깔려 있다는 것은 땅의 숨통을 조인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로써 도시의 땅은 죽어 있고, 죽은 땅이니 인체는 생동감이 약해지고, 생동감이 약해지니 권태증이 쉽게 온다. 뿐더러 흙의 기운(土氣)을 받지 못하니 비장(脾臟)이 제구실을 못해 소화 불량, 사고력 저하,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된다.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이 그저 예민하기만 하고, 참을성이 없고, 생각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도 콘크리트 문명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다.
시멘트 건물을 쓰는 여고생의 생리 불순률이 약 70%에 달한다는 조사결과가 오래 전에 나왔다. 그러한 학교 중에서도 교실과 복도의 바닥을 나무로 바꾼 경우에는 그 정도가 약 30%로 낮아졌다. 시멘트 성분에 ‘방사성 물질’이 있기 때문이다.
살아 숨쉬는 땅은 콘크리트보다 약하다. 그러나 숨쉬는 땅은 변화한다. 변화하면서 모든 것을 너그럽게 수용한다. 그래서 땅은 모든 것의 어머니다. 담장 근처나 잔디의 일부를 텃밭으로 일쿠고, 카펫을 걷어내고 마루바닥을 드러내게 하고, 잠시라도 하루 한 두번 흙 길을 밟아보고 그리고 주말에 야외 눈요기까지 할 수 있다면 어머니 품인 자연으로 한 발짝 다가 선게 된다.
경북 봉화 풍락산 기슭에 통나무 흙집 한 채가 있다. 20평쯤 되어 보이는 이 살림집은 낙엽송과 진흙으로 벽을 쌓고, 갈대로 지붕을 엮었다. 온돌방 외에는 마루바닥이다. 모양만 달랐지 이곳 인디언 집과 흡사 하다.
신부직에서 은퇴한 집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행복한 삶이란 신명을 받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도시의 번잡함을 피해, 더 이상 세속적이지 않기 위해, 더는 빼앗길 것도 없는 세상에서 새 삶을 시작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그의 선택은 낭만 이상이다. 물론 도피도 아니다. 도시는 수많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 고독이고, 시골은 고독이 없는 사막이 아닌가. 진정 그의 선택은 자본주의의 왕성한 소화력에 함락 당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고, 그의 말대로 끝없이 비우고 버리는 삶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는 고소득층이 과소비를 주도하면 저소득층도 덩달아 따라가는 경향을 보고 있다. 이와 같은 ‘소비전염병’이 ‘큰집전염병’으로 번지고 있는 것이다. 능력이 있고 식솔이 많다면 누구나 큰집에 살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집이 저절로 크게 보이고 우러러 보이는 것은 아니다. 비록 작은 집일지라도 거기에 자연이 있고, 촛불 하나가 집 전체를 채울 수 있다면 그 집은 결코 작은 집은 아닐 것이다.
맴피스 한인사 편찬위원장 /ikhchang@a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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