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신입생때 만나 같이 다니며 자라다가 결혼한 우리 부부는 동갑내기이다. 처음 사귈 때 갓 스물의 우리들을 보시는 부모님들은 걱정이 많으셨다. 둘다 나이도 어린데다가 드라마들마다 나오는 ‘그림 하는’ 여자들은 늘 유별난 성격들이니 사실 시어머니께서 속으로 걱정하신 것도 무리가 아니시리라.
지난 11년을 사는 동안 시댁이 어렵고 어색한 때도 있었지만 어느 때부터인지 자연스럽게 시어머니께 의논을 하게 되는 일이 많아졌다. 어떨 때는 내가 지금 같이 앉아서 웃으며 뵙는 이 분이 신혼 초 어렵기만 하던 그분이신가 싶다. 십년을 넘어 겪으며 서로의 속을 더 이해하게된 지금, 시어머니는 내게 큰 의지가 되신다.
결혼 초 아직 어린아이를 키우며 내가 여러가지 일로 쩔쩔 매며 다니는 동안 육남매를 낳고 기르시느라 약해지신 허리 때문에 힘든 일을 못하시는 시어머니는 약한 허리를 “고급병”이라고 부르시며 늘 쑥스러워 하셨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고 건강해 보이시는 분이 일만 하면 아파 오는 허리 때문에 우리 살림에 손을 보태주시지 못하는 것이 늘 미안하신 듯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시어머니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고 느끼고 가까워진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지금은 익숙해져서 견딜만하지만 결혼초에는 하루걸러 한번씩은 밤에 혼자 밀린 집안 일을 하느라 잠을 줄여야 했다. 생활에 끌려 다니다시피 살던 나에게 시어머니는 당신이 평생 집안 일만 하시느라 자신의 일을 가져보지 못한 고통을 아신다며 지금 당장은 힘들더라도 절대 내 일을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를 하셨다 .
그 말씀에 용기를 내어 돕는 일손을 구하고 정신없이 살다보니 어느새 아이들이 자라가고 있다. 내가 나의 일을 하며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 그때 시어머니께서 내게 일을 놓지 말라고 마음으로부터 밀어 주지 않으셨다면 내가 나의 일을 계속할 수 있었을까 싶다.
어느 때부턴가 우리 시어머니는 만나기만 하시면 우리 가정의 미래를 놓고 힘있는 격려를 하신다. 생활이 바쁘다보니 마음만큼 자주 뵙지도 못하는데 어머니의 그런 신뢰의 말씀을 들으면 뵐 때마다 정이 들고 이상하게 힘이 난다. 평소의 기도가 묻어 나오는 말씀이셔서 그러리라. 그렇게 얻은 힘은 나에게 웬만한 어려움 쯤은 아무렇지 않게 견디게 하는 주부로의 배짱을 가져다 준다.
지난 여름 어느날 우리 부부는 분갈이를 하고 있었다. 연한 줄기의 나무가 뿌리는 단단히 화분에 얽혀서 빼지를 못하고 쩔쩔 매는데 마침 들리셨던 어머님이 화분을 옆으로 턱- 쓰러뜨린 후 슬슬 손바닥으로 바닥에다 굴리자 거짓말처럼 흙이 쏟아지며 나무가 쏙 빠지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우리가 우리 일로 뛰어 다닐 동안 온갖 것을 키우는데 익숙하신 시어머니는 마음으로는 우리에게 끝없는 격려를 보내시며 자주 못보는 손녀들 대신에 말 못하는 식물들과 친해지셨고 익숙하게 그 것들의 시중을 들어 주고 계셨던 듯 싶어서였다.
요즘은 작은 전자하-프를 배우시는데 그 악기는 노래를 곁들여서 연주해야 제 맛이 나지, 아니면 밋밋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라고 하시며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곁들이신다. 내 앞에서 부르시는 끊어질듯이 수줍게 이어지는 시어머니의 노래를 들으며 젊었을 적, 해보고 싶은 것도 많았다던 그분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언젠가 본 사진속에서 단발머리 소녀로 서 계시던, 나의 큰딸과 똑같던 시어머니의 얼굴. 그분이 기르신 여러 자손들. 그 속에 서있는 젊음이 점점 옅어지는 나 자신. 어느 순간, 드디어 내가 긴 다리를 건너 그분의 가족의 영역으로 들어서던 느낌이었다.
그 분의 베란다에 꽉 찬 싱싱한 분재나무들처럼 올해 칠순을 맞으신 우리 시어머니도 또 다른 모든 어머니들도 늘 건강하시면 좋겠다. 그 분들의 격려를 먹으며 힘을 얻는 자손들이 아직도 많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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