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긴 세월이 거짓말같이 뚝딱 지나갔다. 조국이 어렵던 시절, 그렇게도 공부하고 싶던 사진과목이 전국 어느 대학에도 없었기에 나는 젊음 하나를 밑천으로 알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967년 초봄, 대한항공도 태어나기전이라.
외국비행기에 실려 정부에서 환금해준 거금 이백불을 품고 한번 가면 다시 오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태평양을 건넜다. 그 당시 우리보다 앞서 왔던 유학생들은 우리의 지참금 이백불을 몹시나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달랑 오십불에 배타고 노동해가며 태평양을 건넜다는 그분들에겐 거금 이백불에 비행기타고 날라 온 녀석들이 몹시 부럽기도 하였겠다. 중학입학 기념으로 부친으로부터 받았던 ‘카에라’ 한 대가 앞길을 정해줄 줄은 미처 몰랐었다. 중고교를 다니며 줄곧 사진반으로 뛰며 오인의 사진쟁이들은 영원히 사진쟁이로 나자고 굳은 도원결의 비슷한 걸 했지만 나머지 녀석들은 기개를 꺾고 이리저리 다른 곳으로 흐르고 나 혼자만 미련스럽게 한 우물을 파다 오늘에 이르렀다.
어찌보면 후딱 지나간 세월같지만 우리 윗 세대들이 그렇게도 지겨워했다던 일제치하가 36년을 끌었던걸 생각하면 나의 미국 생활도 오래되었다는 느낌이다.
6.25를 전후해서 도미한 분들도 아직 상당수가 거주하고 계시니 나 정도의 교민이 체류기간을 들먹이는 건 주제넘은 짓이 되겠다. 소년인지 청년인지가 애매하던지 시절에 조국을 떠나 장년에 접어든지도 한참이나 세월의 빠름을 절감하겠다.
월남전이 한참이던지 시절에 온 덕분(?)에 반전데모는 지겹도록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이라크와의 반전 데모가 기승을 부리는 걸 보면 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그 당시에는 대학생은 영주권 신청이 너무나 쉬워 심심풀이로 받아둘까 하였으나 친구의 만류로 주저앉고 말았다.
당시에는 요즘처럼 지원제가 아닌 징병제라 많은 학생들이 월남전에 차출되었지만 외국 유학생도 영주권만 받으면 즉각 영장이 나온다는 걸 친구에게 듣기전까지는 몰라서 자칫 유학왔다가 월남전몰용사가 될 뻔하였다.
최근 이민 오신분들은 어쩌다 나의 도미연도를 묻고는 미국사람 다 된걸로 혼자서 결정짓는 이일을 자주 보게된다. 아직도 보리밥에 된장찌개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인데 말이다.
반미데모에 나선 아들에게 "네가 드디어 빨갱이가 되어가는 모양이로구나"라고 한탄했다는 한국의 어머니뿐만이 아니라 기를 쓰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해온 프랑스에서도 기성세대들은 나치의 군화발 아래서 우리를 구해준 게 누군데 왜들 이러느냐고 한숨을 짓는단다. 이렇듯 세대간 갈등은 동서를 막론하고 점점 심화되어간다.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타협은 점점 멀어지고 양극화 현상만 일반화되는 듯한 현상이 어지럽게 느껴진다. 오늘도 도처에서 반전데모는 계속되고 샌프란시스코에서만도 하루 90만달러가 경찰의 시간외 근무로 어려운 시재정에서 빠져나간다는데 데모하는 그들과 자식들을 전장에 내보낸 부모들을 양쪽에 두고 나는 어느새 타임머신을 타고 월남전이 한창이던 그 당시 반전 데모하던 학생들과 전사통보에 통곡하던 참전군인들의 부모들을 떠올리며 착잡한 심정을 추스를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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