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호텔에 가보면 복도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움직임을 알리는 사진 화보가 붙어 있다. 맨 위쪽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악수하는 사진이 있고 그 밑에 김정일과 현대의 정주영, 정몽헌 부자가 회의하는 사진이 붙어 있다. 누가 봐도 “나 죽은 다음 내 아들 잘 좀 봐주시오” 하는 냄새가 물씬한 장면이다.
정주영씨가 오른쪽에 김정일 왼쪽에 정몽헌씨를 세워 놓고 두 사람의 손을 꽉 잡은 채 기념촬영한 사진도 있다. 아버지가 아들을 생각하는 모습이 역연하다. 그리고 현대의 후계자는 정몽헌씨인 것 같은 인상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그 정몽헌씨가 투신자살 해버렸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결국 현대가 정치게임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겪지 않아도 될 비극을 겪은 셈이다.
한국의 어느 유명한 재벌 L씨가 평소 아들에게 신신당부한 말이 있다. “정치하는 친구들과 절대 가까이하지 마라. 그렇다고 너무 멀리 하지는 말고 그저 욕먹지 않을 정도로만 사귀거라. 기업이 정치에 끼어 들면 망하는 법이다.” 2세한테서 직접 들은 이야기다.
한국에서는 돈을 벌면 기업에만 열중할 수가 없다. 정치판의 눈치를 봐야 하고 누가 실세인가를 알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피곤한 일들이 수없이 닥친다.
정치인을 무시하면 전두환 시절의 국제상사나 DJ 시절의 대한생명 꼴이 될까봐 무섭고, 가까이 하면 다음 정권에서 “너 누구누구하고 친했지?” 하고는 칼날이 들어온다. 물론 내려치는 명목은 “누구하고 친했지”가 아니라 탈세나 규정위반이다. 기업이 투명하면 무슨 걱정이 있을까마는 정치인들에게 비자금을 내놓다보니 단추가 처음부터 제대로 끼워졌을 리가 없다.
정몽헌씨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정치적인 타살이다. 결국 DJ와 김정일 돕다가 정치적인 바람에 휘말려 생긴 비극이다.
송충이는 나뭇잎을 먹고 자라야 한다는 속담도 있지만 기업인은 기업에만 몰두해야지 기업인이 ‘돈도 벌고 권력도 가지고’하는 식으로 한눈 팔면 기업도 안되고 망신당하기 쉽다.
정주영씨는 꿈이 컸다. 그러나 너무 컸다. 대통령도 출마하고, 수천 마리의 소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 뉴스의 초점에 서는 등 그의 생애 후반은 화려하게 수놓아졌지만 결국 그 후유증이 다음 세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려면 능력도 함께 물려줄 일이다. 능력은 약한데 재산을 많이 물려주면 재산이 사람을 잡아먹게 된다. 사람이 재산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재산이 사람을 관리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재산이 80이면 능력도 80이라야 선대의 사업이 유지될 수 있다. 1세 때보다 사업이 더 번창하려면 2세의 능력이 90이나 100이 되어야 한다.
남북사업은 정몽헌씨에게는 너무 무거웠다고 생각된다. 금강산 가면서 보니 승객이 200명인데 승무원이 350명이다. 이래 가지고 무슨 비즈니스가 되겠는가. 1주일에 2억씩 적자가 난다고 했다. 현대아산이 아무리 돈 많다 해도 밑바닥이 뚫어지면 견딜 수가 없는 법이다.
더구나 남북사업은 정치가 연결된 사업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북 관계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거니와 북한의 정책도 이랬다저랬다 하기 때문에 위험지수가 너무나 높은 사업이다.
재벌 2세에게는 ‘2세 콤플렉스’라는 것이 있다.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업을 더 확장시키려는 의욕이다. 자신이 기업을 인수한 다음 더 커졌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2세들의 ‘죽음에 이르는 병’ 이다.
정몽헌씨의 비극은 부자도 고민이 있다는 것을 실감 있게 보여준 사건이다. 그리고 세상은 고통에 의해 평준화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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