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정치의 발상지 고대 아테네에서는 오스트라키스모스(ostracism)라는 제도가 있었다. 아테네에 민주정치를 확립한 정치가 클레이스테네스(Cleisthenes)가 기원전 508년 폭군의 재등장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 도입한 이 제도아래 아테네 시민들은 세력이 지나치게 강해져 독재할 수 있다고 우려되는 인물이 있으면 비밀투표를 열어 사기 그릇 쪽에 위험인물의 이름을 새겼는데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사람을 10년동안 강제로 추방했다고 전해진다.
민주주의를 보호한다는 좋은 취지에서 시작됐지만 곧 정쟁의 수단으로 둔갑했다. 처음에는 도입된 후 20년동안 시행되지 않다가 정치가들은 이를 상대 당파 지도자들을 추방시키는데 이용할 수 있다는 기발한 착상을 떠올렸다.
기원전 480년대에는 거의 해마다 테미스토클레스, 키몬 등 유명한 정치가들이 보따리를 싸야했고 결국 아테네에서 이름 있다는 정치가들은 모두 한번씩 추방을 당하는 사태가 초래됐다. 피해자들에게 억울할 뿐 아니라 페르시아 전쟁에서 리더십을 발휘했을 지도자들을 상실해 국익에도 큰 손실이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클레이스테네스도 피해자가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한마디로 민주주의가 잘못 응용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로부터 2,500년 후 지구 반대편에서 역시 시민들에게 더 많은 정치력을 부여한다는 취지에서 제정된 법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사태가 재연되고 있다. 물론 그레이 데이비스 주지사가 제대로 국정을 운영했다면 지금 사면초가에 놓이지 않았을 것이다. 데이비스를 위해 눈물을 흘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선거에서 선출된 공직자의 소환이나 탄핵이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정치제도의 안정과 연관된 문제다. 이번 소환 캠페인이 의거한 1911년도 주법은 얼마나 생각 없이 제정됐는지 선거등록기간을 단 하루에 불과하게 만들 수 있도록 되어있다. 더욱이 주지사가 소환될 경우 부주지사가 계승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부주지사의 직책 중 하나가 주지사가 사임하거나 탄핵된 경우 후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환법이 현재 해석되는 바에 따르면, 거의 아무나 출마할 수 있는 후계자 선거에서 수많은 후보가운데 가장 많은 표를 받은 후보자가 미국 최대 주의 주지사가 된다. 우선 500명 이상의 후보 이름을 어떻게 투표용지에 모두 적어 넣을지 궁금하다. 그리고 이같이 당선된 주지사가 소환 반대표보다 적은 지지표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1,500만명 등록유권자 인구의 6%에 해당하는 약 90만명의 서명 때문에 캘리포니아는 지금 재정위기아래 소환선거에 전념하게 됐다. 후보들의 선거 캠페인에 얼마가 소비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고 최소 3,000만달러의 공금이 선거비용으로 지출될 전망이다.
한편 소환선거에 따른 불안정 때문에 가주 신용등급은 지난달 A에서 BBB로 평가절하돼 수억달러의 손실이 추가로 예상된다. 무엇보다도 가주 정치가 과격화되면서 앞으로 이같은 수억달러짜리 정치 서커스가 반복되지 않는다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이를 계기로 한국식의 ‘억지’ 정치시대가 캘리포니아에 도래한 것이 아닌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우 정 아<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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