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귀담아 듣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다. 문제 해결은 문제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남의 비판이 아프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문제 파악에 도움이 되는 까닭이다.
요즘 해외여행을 해보면 외국에서 반미감정의 파고가 높은 데에 놀라게 된다. 특히 유럽인들이 미국에 대해 갖고 있는 불쾌한 감정은 심각한 수준이다. 미국이 인심을 잃었구나하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부시 대통령에 대해서는 증오에 가까운 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미국은 지금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세계 최강이다. 당할 나라가 없다. 무역, 인터넷, 연예 등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뭐든지 1등이다. 그러나 1등은 항상 미움받는 법이다. 처신을 잘해도 오해 사는 법인데 거만하다는 인상까지 풍기는 날엔 사방에 적이다.
힘있는 나라가 힘을 함부로 쓰면 어떤 이미지가 형성되는지 우리는 소련의 헝가리, 체코 침공에서 본적이 있다. 힘이 셀수록 겸손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부시의 치명적인 단점이다. 1등의 처세술을 익히지 못한 것이다.
미국은 세계 최강이지만 존경 못 받는 1등이다. 미국은 American Spirit을 자랑하는 나라인데 그 미국 정신이 왜곡되어 엉뚱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자유, 인권, 개방, 정의, 관용, 정직, 개척정신-이런 것들이 미국 정신이다. 불행하게도 최근 미국이 보여준 것은 전혀 다른 얼굴이다. 테러와 관계 있어 보이면 아무나 연행할 수 있고 아랍인이면 무조건 의심하며, 미국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 나라는 적대시하고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제조를 막기 위해 전쟁을 하는 것이라고 해놓고는 아무 것도 증명하지 못하고, 후세인이 9.11테러와 관련 있는 것처럼 말을 흘렸으나 후세인과 9.11과는 무관함이 밝혀져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정부의 말을 믿어야 할지 국민들이 난감해 하고 있다. 해롤드 마이어슨이라는 미국의 저명한 칼럼니스트는 부시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위험한 대통령이라고 평하고 있다. 국민을 어디로 끌고 가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에 직면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이를 핑계로 미국의 극우세력이 자신들이 평소 생각해온 것을 실현에 옮기려는 혁명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또 하나의 탈레반이다. 학부모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해서 자녀들에게 종아리를 때려 받아들이게 하고 말 안 들으면 밥을 굶기겠다거나 용돈을 줄이겠다는 식으로 위협한다면 옳은 자세일까.
미국이 최근 그런 식으로 우방을 대하고 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시대는 물러가고 지금은 친미냐, 반미냐로 세계가 갈라져 있다. 미국이 이 정책을 고수한다면 스스로 American Spirit을 파괴하는 것이다. 정신이 결여된 정책은 리더가 취할 자세가 아니다. 미국은 테러의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모든 분야에서 미국 정신을 잃어가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은 성격상 혼자 치를 수 있는 전쟁이 못된다. 세계 곳곳에서 테러리스트들은 미국의 인명과 재산을 노리기 때문에 이 전쟁에서 승리자로 나타나려면 각국의 협조가 필수조건이다. 그렇게 되려면 미국이 겸손할 줄 알아야 하고 미국 정책에 이해타산이 아닌 ‘정신’이 깃들여져 있어야 한다. 정신이 결여되면 가치(value)를 제시할 수 없고, 가치를 제시 못하면 우방국의 신임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이 이라크에 전투병력을 파견하느냐 마느냐도 부시의 외교정책이 자신의 재선용이 아닌 ‘미국 정신’을 얼마나 담고 있느냐를 진단해 봐야 한다. 한국인의 목숨이 부시의 재선용으로 희생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철 주필
chullee@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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