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뉴욕지구 원로성직자회 부회장인 라정순 회장은 인생의 만년을 미국에서 보내는 사람으로서 편안한 노후생활을 만끽하는 대표적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그는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부인 안화운 권사와 결혼 60주년, 회혼식을 가졌고 지난 일요일인 9월 28일 소속 교회인 퀸즈장로교회에서는 그의 83회 생일 축하연이 열렸다. 프레쉬메도우에 있는 전원같은 집에 살면서 결혼 50주년 기념으로 자녀들이 사 준 캐딜락을 손수 운전하고 다니는 그는 각종 사회활동에도 활발히 참여하는 건강까지 누리고 있다.
라 장로는 황해도 황주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제 때 남들이 하기 어려웠던 동경 유학을 했고 해방 후 북한에서 판사와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반동으로 몰리기도 했으나 1.4후퇴 때 월남, 남미 이민을 거쳐 뉴욕에 정착했다. 슬하에 4남3녀가 있는데 모두 의사, 목사, 선교사, 간호사, 치과의사 등 전문직이나 회사 사장등으로 성공했고 19명의 손자를 두고 있으니 그야말로 다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라 장로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 해 황주에서 보통학교, 평양에서 광성 고등보통학교를 모두 우등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동경의 중앙대학 법과에 진학했는데 여기서도 일본군 학병에 징집당해 단축 졸업할 때 우등으로 졸업했다. 당시 라 장로가 다닌 중앙대 법과의 2년 후배인 황장엽씨가 야간부에 다녔는데 이런 연유로 라 장로는 요즘 황장엽씨 방미추진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학병에 끌려가 일본 구주에 있다가 해방 후 고향에 돌아온 그는 당시 조만식 선생이 이끌던 조선민주당의 황주 군당부를 조직하여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부르조아 정당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당국에 끌려가 일주일간 모진 고문을 받다가 조만식 선생의 항의로 풀려났는데 몇달 후에는 조만식 선생이 투옥되어 옥사했다고 한다.
라 장로는 그 후 정치를 그만 두고 해주공업학교의 훈육주임이 되어 두달간 근무하던 중 소련 군정 당국이 실시한 판검사 시험에 합격, 경기도 금촌 재판소장과 남천 재판소장을 지냈다. 이 때부터 북한에서는 사상 검토가 시작되었는데 그는 1947년 7월 평양의 법률학원에 불려가 민주주의에 대해 강연한 내용이 일본 제국주의시대의 자본민주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판사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그는 고향인 황주에 돌아와 변호사를 개업했으나 황주 공산당이 검찰에 압력을 넣어 체포령이 내리자 해주로 피신했다가 다시 사리원으로 옮겼다. 사리원에서 변호사로 명성이 나면서 멀리 평양에서도 사건 의뢰가 들어와 돈도 많이 벌었으나 사리원 공산당에서 또 반동으로 몰아 수안으로 쫓겨가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수안에서 금절도 피의자들을 변론하다가 법정에서 공산당원인 검사와 반동 논쟁으로 충돌한 것이 화근이 되어 구속 위기를 맞았다. 그런데 마침 담당검사가 라 장로의 금촌재판소장 시절 서기과장을 지낸 사람이었다. 그가 제의하기를 변호사만 그만둔다고 하면 상부에 불기소 처분을 건의해 보겠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사퇴서를 써 주었는데 그래서인지 더 이상의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1949년 시골에 내려가 정미소를 차렸으나 북조선에 협조하지 않는 반동이라는 이유로 자아비판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서둘러 정미소를 처분하고 사리원으로 돌아와 주물공장을 시작한 후 곧바로 6.25를 맞았다고 한다. 그런데 후문을 들으니 정미소를 차렸던 마을에서 6.25 때 공산당의 무차별 학살 만행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 때 정미소를 처분하고 떠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변을 당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라 장로는 6.25 때 북진한 미군 선발부대를 안내하여 공산군을 색출하는 일을 도왔고 그 부대를 따라 황주까지 와서 그곳 자치회장을 맡았다. 그는 청년 200여명을 모아 인민군 패잔병과 공산당 부역자 등 600여명을 잡아 미군에 인계했고 1.4 후퇴가 시작되자 서울을 거쳐 부산까지 피난했다.
그는 미군부대 통역관, 해군 법무관, 서울 광신상고 훈육주임 등을 거쳐 1964년 민정이양 당시 민정당 창당에 참여했다. 민정당 중앙감찰위원에 선출되어 당시 진산파동의 진상조사에 참가했고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관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뇌물과 부정이 판치는 정치판에 신물이 나서 1965년 아르헨티나로 이민했다고 한다.
아르헨티나에서 스웨터 공장을 하면서 한인교회를 설립하고 한인회장도 역임한 그는 1973년 둘째 아들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이주했다. 뉴욕에서 세탁소를 경영하기도 한 그는 1990년 은퇴 후 원로성직자회의 발족에 참가한 이후 줄곧 이 단체의 일을 해오고 있다.
그의 백년해로 동반자인 부인 안화운(82)씨와는 중앙대 2학년 때 중매로 결혼한 부부이다. 라 장로가 학병에 끌려갈 때 안씨는 손가락의 피를 내어 전쟁에서 죽으면 함께 따라 죽겠다고 혈서를 써 줄 정도로 금슬 좋은 부부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부부지간에도 위기는 있었다. 그는 변호사를 개업해서 이름을 날리던 청년시절 자신이 보살펴준 한 여성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이를 안 안씨가 죽음을 결행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다시는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린 적이 없었다는 그는 안씨가 무척 미인이었다는 자랑을 잊지 않고 덧붙인다.
라 장로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유치원 때부터 교회를 다녔고 평생을 독실한 기독교 교인으로 살아왔다. 그는 북한에서 네 번이나 죽을 고비를 만났었는데 그 때마다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죽을 고비를 무사히 넘겼다고 한다. 북한 치하에서 공산당을 경험했기 때문에 철저한 반공사상을 가지고 있어 공산당과 좌익세력을 반대하는 운동에는 앞장을 사양하지 않는다.
남북통일이 되면 제일 먼저 고향땅에 들어가 부흥회를 열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소원이라고도 했다.미국이야말로 지상의 천국이라고 하는 그는 어른이 자녀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것이 효도를 받는 지름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은퇴 후에도 자녀들에게 의지해서 살아갈 생각은 갖지 말고 은퇴 후 생활을 위해 집과 재산을 준비해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라 장로의 이러한 충고는 노후의 생활을 앞둔 사람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인 것 같다.
<이기영 본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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