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식/사이프러스
뒤뜰에 앉아 도시의 소음마저 잠잠한 고요속에서 한낮의 가을볕을 즐겨본다. 담구석에 있는 감나무에는 등황색감들이 여린 가지가 휘어지도록 미련스럽게 매달려있어 모처럼 어머니같은 풍성한 가을의 정감을 느낀다. 그러나 잎잎은 저 열매를 키우기 위해 비 한방울 오지 않는 온 여름을 살아와서인지 윤기를 잃고 있어 병색이 완연하다. 겨울이 깊어지면 저잎들은 비바람에 낙엽지고 나목이 되겠지. 그래서 시인들은 가을을 수확의 계절이라고 표현했던가. 불현듯 젊은 시절 읽었던 어느 시인의 흐느낌 소리가 마음속에 들려와 가슴을 적신다. 어느새 가을병은 가슴속을 먹어 들어오고 허공넘어 파란 하늘에 향수를 느낀다.
가을 저녁은 일찍 오고 밤은 겨울로 이어지면서 깊고 길어진다. 초저녁 잠에서 깨는 한밤중이면 나는 긴 밤을 상념에 빠져든다. 고문같은 불면의 고통을 명상으로 승화시킬수 있는 관조의 나이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산다는것이 무엇인지 입에 익은 화두를 어둠속에 던져본다. 어느 철인의 말대로 산다는 것을 삶의 맹목적인 의지라고 한다면 살아가는 것은 그지없는 욕망의 추구이고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감정의 절제일 것이다. 망각의 늪에서 깨어나 살아온 길목에서 아쉽게 놓친 운들이 후회되고 젊은 날의 치졸했던 실수들이 기억나 부끄럽기도 한다. 때로는 나와 혼담이 있었던 여인들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아내와의 만남은 운명으로 믿고있다.
가을병에 걸리면 몽유병처럼 고향을 그리며 방황하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시심을 일으킨다. 어릴적 형제들이 아랫목 따뜻한 이불속에 발을 모우고 잠자던 밤 꿈결에 듣던 구슬픈 물레소리, 어머니는 호롱불 밝혀두고 물레 잣으시며 한손으로 바퀴 돌리고 또 한손으로 실을 뽑으셨다. 끊길듯 이어지는 운명같은 무명실. 어머니의 외로운 뒷모습이 이제와서 슬프게 기억되는 것은 소아병적인 그리움 때문인가. 그래도 나는 잠 못이루는 밤이면 이민올때 마음속에 담아온 고향이라도 있지만 불행히도 내 자식들과 손자들은 고향이 없다. 도시문명의 질곡과 기계적인 생활속에서 조상을 잊어가고 인생의 낭만마저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훗날 그들의 고향은 어머니로 기억될터이고 모정에 향수를 느끼게되겠지.
그래, 가을은 어머니이고 어머니는 고향이다. 가을이 되면 여자의 모성애는 가을처럼 풍성해지고 남자는 가을병에 위축되어 고독을 느끼고 아이로 거듭 태어나 같이 늙어가는 아내에게 투정을 부린다.
곁에서 아내의 숨소리가 너무나 평화롭다. 돌아 누우면서 배위에 걸치는 손을 곱게 잡아보며 굳어진 손가락 마디에서 세월을 감촉한다. 세월이란 파도를 타고 서로 의지하고 살아온지 어느덧 40년 세월. 이제 남은 날들은 단풍처럼 고와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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